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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2011.07] 전쟁스토리 : 맥아더 원수의 회상록(7회)

전쟁스토리


맥아더원수의 회상록 (7)

<드라마같은 전쟁 말기…회고>



글ㅣ 김능화 (논설위원·전기작가)



미군 단독 점령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미군이 재빨리 일본 땅을 점령, 진주했다.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버텨온 일본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잇따라 원자탄이 투하되자 비로소 백기를 들었던 것이다. 일본 전국이 공포에 떨었다. 내일은 어느 지역에 원폭이 떨어질지? 한 편의 전쟁드라마였다.

일본이 돌연 항복하게 되자 기회주의자란 평을 듣고 있던 소련이 가장 먼저 일본 땅 분할점령을 미국에 요구했다. 여타 연합국들도 이해득실을 따지며 분할을 원했다. 하지만 대일전을 주도해온 미군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미국은 서둘러 일본 점령군 사령관에 맥아더 원수를 전격 발령했다. 그는 대전시 줄곧 일본군과 전투해온 전쟁영웅으로 벌써부터 이름나 있었다. 한때는 고전끝에 일본군에 밀려 호주까지 후퇴해야하는 수모도 겪었다. 일본과 육상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이 필리핀 방위선이었다. 마닐라까지 한때 일본군에 점령당했으며, 민간인 사망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군 최강 관동군까지 투입돼 있었다. 호주까지 밀려온 맥아더 부대는 수모를 견디며 반격태세를 새롭게 가다듬어 다시 남방전선에 진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본군은 차례차례로 패퇴했다. 영국함대 지원도 큰 힘이었다. 영국 해군은 싱가포르에 동양함대 기지를 두고 한때 동남아 제해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동남아지역 전투는 맥아더의 독무대였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지휘관 선두’를 실천했다. 이상과 같은 군 지휘관으로서 모범을 보였기에 그가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잠시 되돌아본다.

맥아더는 점령군 사령관에 취임하자마자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아울러 해산을 명령했다. 결국 군국주의에서 민주국가체제로 바꾸도록 했다. 일명 평화헌법까지 제정토록 이끌었다. 제9조 조항이 대표적이었다.

미국 정부는 패전국 일본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별도기구인 극동위원회를 현지와 워싱턴 두 곳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위세에 압도 되어,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맥아더에 의한 점령정책이 구체화되자 일본 국민들은 “승자인 동시에 강력한 지배자로서 일본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지배자라기보다 겸허했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맥아더는 절대 권력자


맥아더는 승자 독식하듯, 일본 점령정책을 철저히 폈던 절대 군주 같은 권력자란 말도 들었다. 그는 어느 날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권한과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밝힌 바 있다.

“본인은 일본과 일본 국민에 대해 사실상 무제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역사상 어떤 군주도, 총독도, 정복자도, 군 지휘관도, 내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도의 권한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권력은 바로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맥아더 回想錄>.

그러나 맥아더는 독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점령정책의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점령당한 일본 측의 협조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점령이란 것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해 전승국의 의사를 패전국에 강제하는 것이지만, 위로부터의 무조건 강제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되면 지속적인 개혁은 불가능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노조(조합) 결성의 자유, 단체교섭권의 확립 등 노동문제의 현대화, 농지개혁, 남여평등화 등 제반개혁은 전쟁 시작 전부터 일본 내부에서도 요구가 거세져 왔으나 침략전쟁을 행하는 군부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개혁은 맥아더가 새롭게 일본에 가져다주었다기보다 종래부터 있었던 중요 현안들을 맥아더가 이를 수용, 점령정책에 적극 반영시켜 실제 일본을 개혁토록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무자비하다고 할 만큼 제재하며 강제 실현시켰다. 물론 반발도 없지 않았다.


점령과 쇼와(昭和)의 존재 가치


맥아더가 주도한 일본개혁정책이 비교적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중요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 국민들의 생각이 진정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간절히 바란 데서였다. 그 외는 패전국 국민으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개 동양인들의 사고는 권위에 약하다는 것을 맥아더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일본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위 천황의 권위 앞에 맥 못 추듯, ‘푸른 눈의 새로운 지배자’ 맥아더의 군사 통치를 일본인 대다수는 처음부터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유사 이래 일본으로서는 처음 맛본 패전국으로, 일거에 존재가치를 잃게 된 기로에서 마침 새로운 구심점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4년여 동안 죽이고 죽고 하던 전쟁 끝에 패전국으로 전락, 어제의 적군 지휘관을 오늘의 일본의 지배자로 계속 환영하고 존경할 것인지? 날이 갈수록 갈등을 느끼는 일본인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맥아더는 결국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5년 8개월 동안 일본을 지배하다가 물러갔다. 일본인들 중에는 지배기간에도 그 이후에도, 이임 때도 애석한 마음에 젖어 있었다. 동양인이 가진 권위에 대한 약한 심리 때문이었는지, 수다한 지배와 승자의 점령이 있은 세계사에서도 그 같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 점만으로도 맥아더를 앞세운 미국으로서는 일본점령정책에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일본인들은 유독 맥아더에 대해 ‘정복자’가 아닌 ‘해방자’로서 줄곧 환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중요 이유였다.


일본인들의 일관된 생각


맥아더는 처음부터 생각하기를, 일본인들은 대개 전쟁의 책임은 군벌과 재벌에서 비롯되었다며, 미군의 진주는 죽음과 억압·결핍에서 해방된 셈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패전’을 ‘종전’으로, ‘점령군’을 ‘진주군’으로 교묘히 바꿔 불렀다. 그 같은 말로인해 패배의 굴욕은 한순간에 사라졌으며, 전쟁의 끝은 군인들에게 있어서도 시민들에게 있어서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더더욱 굶주리는 일반대중을 위해 식량긴급수입을 서둘러주는 맥아더로부터 일본인들은 구세주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무수한 팬레터가 이를 말해주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인들은 전쟁의 책임은 정치지도자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했지만, 전쟁에 협력한 시민들은 반성에 앞서 맥아더를 ‘해방자’라고 우러러 받드는 사이 반성의 마음은 오히려 사라져 버렸다. 그 같은 분위기 여파로 맥아더는 일왕 쇼와(昭和)의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그 대신 맥아더는 쇼와의 권위를 이용, 일본에 대한 간접통치가 순조로웠기에 그 자리에 있는 한 안전할 수 있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에 있어 제시한 유일한 조건은 ‘국체호지(國體護持)’였다. 그에 대한 미국의 회답은 “일본이 항복함에 있어 일왕뿐만 아니라 일본의 통치권한은 전적으로 점령군 사령관에게 종속되므로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고 일깨워주었다.

점령이 시작되자 쇼와가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 미 대사관을 찾았다. 그로서 종속관계를 확인시켜 주었다. 맥아더는 그 대신 쇼와의 전쟁책임을 비로소 면죄시켜 주었다. 그 때문에 맥아더는 쇼와에 비해 정신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쇼와는 긴 역사를 통해 정치적 실권자, 군부에 이용만 당해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후광을 업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으며, 전쟁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패전 후부터 일왕은 푸른 눈을 가진 맥아더를 위해 연출하기 시작했었다.

결국 일왕은 은인 맥아더의 대일정책 성공을 위해 적극 도왔다. 군사전문가는 대뜸 맥아더를 ‘위인’이라고 평가하는 등 일왕의 행보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는 잇기를 “일본은 행운이다. 맥아더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맞이했기에 일본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찬양했다. 맥아더 역시 일본에 대한 점령통치 상 쇼와의 도움은 불가피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 같은 생각에 대해 여타 연합군 수뇌는 쇼와가 A급 전범자로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동정론에서 비롯된 억지라는 논리를 폈다.

맥아더 ‘회상록’ 중에는 “일왕은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로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점령정책에 성실히 협력했으며 영향력도 변함이 없었다.”고 거듭 회고했다. 하지만 연합국의 시각은 달랐다. 맥아더의 생각은 쇼와를 단죄하지 않기 위한 자기변명이었다고 비판의 끈을 멈추지 않았다.


유리한 ‘대리인’에 힘입은 정복자


2차대전 시 일본의 항복은 3개 군사 동맹국 가운데 맨 마지막이었지만, 예상보다 빨랐던 것이다. 미국은 그 때문에 점령준비를 충분히 못했다고 했다. 특히 정치 이외 일본의 문화와 풍습·관습 등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였다는 것. 그 같은 준비 미비로 일본에 대해 점령군의 손으로 개혁을 진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고 훗날 맥아더는 회상록에 적어 두었다. 당시 미국 스스로가 일본 점령 형태를 ‘간접점령’으로 규정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했다.

즉 기존의 일본 정치 형태와 반대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점령군 측에 유리한 대리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맥아더 측근에는 다행히도 그런 자가 두 사람이나 있었다. 한 사람은 ‘쇼와’이고, 또한 사람은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였다. 맥아더의 충실한 부관 반카 대령은 당시 이런 말을 했다.

“맥아더는 심리적 측면에서는 일왕을 통해서, 정치적 측면에서는 수상 요시다를 통해서 효과적인 점령정책을 펼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맥아더는 일본 국민의 정신 영역 지배를 위해 일왕의 권위를 십분 이용했다는 것. 즉 그날그날 정치적 문제 처리는 수상 요시다를 이용했으며, 본인은 초연하게 군림만 했다.”고 덧붙였다. 그런 식으로 맥아더는 지배구조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시다의 속마음은 달랐다. 그는 실제로는 개혁에 반대했으며, 때로는 많은 이의 신청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국내정치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한 점령군 사령관의 권위 앞에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는 일관되게 민주주의 원리를 앞세워 일본의 개혁을 계속 이어갔다.

따라서 맥아더는 점령정책의 두 기둥인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반드시 지키겠다며,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하지만 군비철폐란 평화주의는 중도 폐기되었다.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 발발 등 동시에 격화된 긴장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맥아더는 평화를 사랑하는 신사였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전투 명 지휘관이기도 했다. 특히 그의 돌연한 평화주의 변심을 비판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런 시대적 상황으로 바뀐 현실에 대해 먼저 비판하는 것이 순서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맥아더는 일본인의 은인


평화헌법제정과 군비라고 하는 모순은 일본 국민이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라고 맥아더는 생각했다. 그 같은 문제를 남겨둔 채 맥아더는 돌연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니. 일본 국민들은 맥아더가 점령군 사령관직에서 그만 물러났다는 소식을 점하자 모두가 놀랐다. 일본인들은 점령당한 처지였는데도 오히려 맥아더를 좋아하고 그의 개혁정책에 순종해 온 것이다.

반면 그 무렵 그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정에 찬물을 끼얹는 미 상원 청문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증언하기를 “일본은 장차 2세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2세론’을 펴 관심을 모았다. 맥아더는 자기조국 못지않게 일본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일본인들은 이해했다.

‘푸른 눈의 大君’ 맥아더가 일본 땅을 떠난 지 어언 60년.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대다수 일본인들은 지금도 그를 못 잊고 동경하고 있다. 그가 이룩한 수많은 개혁에 대해서도 전후 일본의 방향을 설정한 것 등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수시로 되돌아보며, 그를 화제꺼리로 삼는다.

2003년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은 그곳에 맥아더가 일본에서 실행했던 민주개혁을 적용하려 했다. 그것이 가능할 것으로 미국은 믿었지만, 기대는 빗나가 버렸다. 민족성, 토양이 맞지 않았기에, 거부반응이 잇따라 갈등만 일으키고 혼란만 부추겼다. 무엇보다 지금 미국에는 맥아더 같은 인물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라크인은 일본 민족과는 격이 다르다. 다민족, 다종교이며 정복자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 역사는 되풀이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미국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맥아더는 전후 일본을 개혁했으며, 은인이었다고 하겠다. 동시에 무엇보다 당시 일왕 쇼와(昭和·裕仁)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상은 맥아더의 일본에서의 역할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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