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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2011.08] 전쟁스토리 : 맥아더 원수의 회상록 (8회)

전쟁스토리


맥아더원수의 회상록(8)

<연합국들. ‘쇼와’ 전범으로 구속 요구>


글ㅣ 김능화

(논설위원·전기작가)



‘푸른 눈의 大君’, 맥아더


소위 황거(皇居)라고 불리는 일왕 쇼와(昭和)의 주거지와 마주한 도쿄 중심지역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 인근 제1생명빌딩을 차지한 미 극동군사령부(일명·점령군사령부)를 찾아 ‘푸른 눈의 大君’ 맥아더를 쇼와가 방문했다.

그 무렵 소련과 영국, 중국, 호주 등 연합국이 맨 먼저 쇼와(昭和·裕仁)부터 전범자로 체포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을 때였다. 때문에 맥아더는 생각하기를 쇼와가 자기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것으로 보았다.

쇼와의 말은 달랐다. “나는 일본이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정치·군사면에서 행한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내용으로 털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세계 주요 언론은 쇼와의 속마음은 맥아더의 환심을 사서 전범죄를 면해 보려는 의도에서 맥아더 집무실을 찾아간 것으로  논평했다.

특히 연합국측은 즉각 쇼와를 침략전의 원흉으로 체포, 전범 재판에 회부하라고 거듭 요구했다. 맥아더는 반대였다. 이유는 수수께끼다. 억측만 난무했다. 일설에 의하면 쇼와를 전범으로 구속, 극형에 처했을 경우, 소위 ‘국체호지(國體護持·천황제유지)를 조건으로 항복에 동의한 일본 국민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예상한데 서였다는 분석이 유력했다.

만일 일본 국민의 반란이 일어날 경우, 진압작전을 위해 점령군 외 적어도 100만 명의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는 것이었다. 어떻든 맥아더의 행동은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는 것. 그는 패전국의 왕을 따뜻이 맞이하며,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그 사진이 다음날 일본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연합국은 어리둥절했다.


전범자 체포 명령 발표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 아츠기(厚木) 비행장에 도착한 1945년 8월 30일 밤 첩보부대장(CIC)을 불러 점령명령 제1호를 내렸다. 주요 내용은 전범 제1호로 지목된 일본 전시수상이었던 도우죠 히데키(東條英機·육군 대장)의 즉각 체포와 동시에 전범자 리스트 작성과 검거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포츠담 선언에도 전범자에 대해서는 엄중히 처벌토록 명기되어 있었다. 맥아더에게는 그런 권한도 주어져 있었다. 하지만 초기 미국 정부가 맥아더에게 내린 대일정책 주요 목표는 일본의 민주화부터였다.

내용 가운데는 일본군 완전 무장해제, 군국주의적 정치와 권위, 군국주의 세력 완전 제거였다. 그 외도 군국주의, 침략주의 정신을 표방하는 제반 단체에 대해서는 단호히 제재, 추방해버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전범자 1호로 쇼와 대신 체포 명령이 내려진 도우죠 히데키(東條英機·육군대장)는 전쟁 중 모든 권한을 쥐었던 전시 수상까지 지낸 자로서 군국주의 상징 인물이었다. 맥아더가 그 점에서 그를 먼저 체포해 일본 국민 앞에 공개 처벌함으로서, 새로운 실권자가 누군지를 일본인에게 알리려는 목적에서였다.

9월 11일. 맥아더 사령부는 CIC 대장에게 제1차로 전범자 중 중범 43명부터 긴급체포하도록 명령했다. CIC는 이미 수사관을 도우죠 자택(東京都 世田谷)에 보내 그를 체포하려 나서고 있었다. 그 무렵 도우죠는 휴대하고 있던 권총으로 자기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달려온 비서관에게 “총탄 한 발에 죽고 싶다. 승자의 재판정에 서고 싶지 않다.” 등의 말을 중얼거렸다. 총탄은 빗나가 죽지 않았다. 할복 자살자가 속출했다. 도우죠 내각 때 후생상 고이즈미(小泉親彦), 문부상 하시다(橋田邦彦) 등이 권총으로 자결했다.

재무상 가야(賀屋興宣)는 점령군 사령부에 자진 출두했었다. A급 전범 검거는 12월 6일로 마감했다. 그 사이 또 한 명의 자살자가 나왔다. 전 수상 고노애(近衛文磨)였다. 전범으로 체포된 용의자는 100명을 넘었다. 미군 병원에 입원한 도우죠도 상태가 좋아져 전범 수용소로 옮기게 되었다.


민주개혁 박차


연합국의 일본 점령 목적 중에는 이미 밝힌 데로 비군사화와 민주화 등 두 가지였다. 일본이 두 번 다시 세계의 위협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승리감에 젖어 있는 미국의 사명감과 동양의 군주 같은 맥아더의 개성은 그 같은 목적을 추진하는데 최적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본 정부나 대다수 일본 국민이 패전국이란 현실을 충분히 지각하지 않은데다가 과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 의문을 품고 있기에 맥아더는 강제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1945년 10월 4일 맥아더는 민주화 실현에 장애인물로 분류된 내무상 야마자키(山崎)와 특고경찰(特高警察) 간부 등 모두를 전격 파면해 버렸다. 동시에 일본이 패전하기 전 정치범으로 수용된 사람에 대해서는 즉시 석방과 아울러 악법 폐기를 명령했다. 파면된 일본 관리는 모두 4,000여 명이나 되었다. 다음 날 알게 된 일본 내각(수상 東久邇)은 큰 충격을 받고 총사퇴했다. 이어 시대하라(幣原喜重郞) 내각이 등장했다. 한편으로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었던 일본 공산당 간부 등 정치범들에게는 오히려 맥아더가 은인이며 해방자였다. 연합군마저 ‘해방군’이란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10월 10일 교도소에서 석방된 일본 공산당 간부 두 명(志賀義雄·德田球一 등)은 복간된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에 ‘인민에게 호소한다’며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연합군의 일본 진주에 따라 일본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서광이 비췄다. 우리들은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한다.”

곧이어 출소자들은 가두행진 후 맥아더 사령부 앞에 모여 만세 3창을 불렀다. 비로소 전쟁 이전의 일본 가치관은 모두 부정되었다. 맥아더는 일본인들 눈에 정복자 아닌 새로운 민주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때문에 맥아더의 모습을 보려고 모여드는 군중 때문에 사령부 앞에는 날마다 대혼잡을 이루었다. 또는 수백 통의 팬레터까지 날마다 날라 들었다. 대개 내용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분으로 영구히 일본에 남아 주기 바란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잘 어울리는 분이며, 일본은 점령당하기 알맞은 국민인 것 같다.”고 했다.


도쿄는 맥아더의 수도인 셈


맥아더가 ‘푸른 눈의 大君’으로 군림중인 일본 도쿄는 도심 대부분의 건물이 점령군에게 징발 당했다. 건물 수만 해도 600여 채. 미국 정부는 장차 일본 점령에 대비, 1944년 11월에 시작한 도쿄 공습 때부터 미리 징발 예정인 건물만은 폭격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징발한 빌딩에는 새로운 주인에 의해 별도의 이름을 붙였다. 도시 주요도로 이름도 영어 이름으로 바뀐 곳이 많았다. 맥아더에 의한 개혁은 여러 면에서 이뤄져 갔다. 과거 일본은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일본이 태어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수도 도쿄는 이제부터 미군 점령으로 ‘맥아더 수도’로 바뀌었다. 맥아더의 영향력은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연합국들도 맥아더 앞에서는 무력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방통행은 피했다. 일왕 쇼와에 대한 전범자 처리를 두고 연합국과 마찰을 빚은 것만은 예외였다.


천황, ‘인간선언’


전후 최초로 1946년 새해를 맞아 신문지상에 일왕 쇼와(昭和)의 조서(詔書)가 발표되었다. 그 조서 안에 소위 ‘왕의 인간선언’ 구절이 들어 있었다. “본인과 그대 국민간의 유대는 시종 상호신뢰와 경애(敬愛)에 의해 맺으면, 단연코 신화와 전설 등에 의해서 생성될 것이다. 다만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치부,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고 하는 가공적인 관념을 갖게 하는 것을 배격한다.”

즉 조서 내용은 일왕 자신이 스스로 자기 신격화를 부정했던 것이다. 조서 자체는 지금까지의 칙어(勅語) 스타일을 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왕의 신격화를 파괴하기 위해 당시 시대하라 수상(幣原)이 맥아더와 민정국장과 상담 결과 나온 것이었다.

원안은 사령부 내부에서 만들어져 그것을 기초로 영어의 달인 시대하라 수상이 정리, 시종장에게 번역문을 마무리 하도록 해 조서가 성안되었다. 그런데 왕의 ‘인간선언’ 작성과정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천황을 전범재판에 넘기자는 소리가 높아진 1945년 12월께, 사령부로부터 궁내성에 대해 만일 천황이 신이 아니라고 표명한다면 천황의 입장이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어, 이 보고를 접수한 당시 시대하라 수상(幣原首相)이 쇼와(昭和)를 면담, 건의했던 것”이라고 한다.

초안은 시대하라 수상이 영문으로 작성하고 그것을 비서관(福島愼太郞)과 문부상(前田多門)이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미국인 저널리스트 마크 게인도 ‘일본 일기’에서 ‘천황의 신격화’를 포기한 최초의 초안은 실은 다이크 준장 사무실에서 협의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적어 두었다.

사령부 내 CIE(민간정보교육국)에서 작성, 시대하라 수상과 궁내성이 최종적으로 완성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그 조서(詔書)는 언론에 발표하기 전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외상에서 맥아더에게 전달, 그의 양해 아래 ‘인간 선언’이 발표된 것이었다. 맥아더도 곧 바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맥아더의 개혁

일본 헌법<일명 맥아더 헌법>의 원안이 사령부 민정국 사람들에 의해 불과 일주일 만에 성안된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맥아더는 점령 초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봉건적인 명치헌법은 개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개정을 시사하는 발언을 거듭했으나, 당시 일본 정부로서는 헌법을 새로 만들 능력도 의사도 결여돼 있었다. 게다가 극동위원회 발족을 눈앞에 두고 있어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헌법 개정에 대한 기정사실을 시급히 받아들여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령부는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일본헌법 초안을 시급히 만들었다. 극동위원회란 미국이 단독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느낀 소련이 SCAP(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위에 점령정책을 결정하는 최고기관을 두기로 제창, 1945년 12월에 만들어진 기구였다. 위원회를 구성하는 미·영·소·중 4대국은 거부권을 가지며, 한나라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 정책은 시행될 수 없었다. 맥아더는 위원회 설치를 반대, 격노했다. 위원회 활동 개시가 1946년 2월말로 돼 있어 맥아더와 사령부 스텝은 중요한 점령 정책은 그전까지 마련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신헌법 문제도 그 때문에 개정을 서둘렀다.

맥아더는 ① 천황의 지위는 국민의 주권을 기초로 하며 ② 전쟁 포기, ③ 봉건제도 폐지 등 3개항을 기본 원칙으로 정했다. 그 같은 ‘맥아더 노트’가 밝혀짐으로서 사령부 민정국 주도로 구체적 작업이 진행되었다.

결국 일본 신헌법 초안은 1946년 2월 3일부터 일주일 뒤인 12일 완성되었다. 그 초안은 곧바로 일본 정부에 넘겨졌다. 맥아더 사령부는 그 초안대로 헌법을 만들도록 재차 요구했다. 민정국장은 “초안대로 헌법을 완성하면 천황은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대하라내각(幣原內閣)은 한방 맞은 듯 멍청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이윽고 천황의 지위를 사령부가 정한대로 수용, 결국 사령부 원안대로 일본 신헌법은 그해 11월 3일 공포되었다. 맥아더의 의지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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