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유사시의 중국의 대응



엄호건



원유, 쌀... 본격적인 지원을 단행한 중국



한반도는 종종 중국 근대사의 간방(艮方)으로 되어 왔다. 아시아 근대국가의 제
일인자(Ace)로서 발흥한 일본과 한반도의 패권쟁탈에 패한 청일전쟁(1894-95년)은
청조멸망의 서곡이 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다음해에 발발한 한국전쟁(1950-53년)에서는
[인민의용군]으로서 참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전사자 100만명(서방측 추계)에
달하는 참사를 기록했다.


[한반도의 변사는 중국에게 곤란을 초래한다]


과거 100년동안의 역사의 교훈은 현재도 중국의 한반도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중국정치지도자가 다양한 기회를 통해 강조하는 [중국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고 있다]는 자세는 역사의 교훈에 입각한 에누리없는 바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시장경제화를 지레로 국내 경제건설을 최우선하는 강택민지도부의 입장에서는
[한국유사]는 있어서는 않될 시나리오이다.


[북한붕괴]에 대한 불안이 부상한 94년이후 중국정부는 독자적인 위기회피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위기회피책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1996년 5월에 북한의 홍성남부수상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정부와 체결한 [경제기술협력협정]이다.


이와같은 협정은 중국의 5개년계획에 맞추어서 양국이 5년마다 체결하고 있으며,
[경제기술협력]이라는 명칭과는 모순되게 북한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경제지원협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은 96년에 시작된 제9차 5개년계획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양국의 협정내용을 공표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협정의 내용을
둘러싸고 다양한 억측이 난비(亂飛)하게 되는 것이지만, 이번에 북경의 중국정부당국은
서방보도기관 등을 통해서 신협정의 골자를 밝히는 이례적인 조치를 처했다. 북한정세가
불투명도를 증폭시키고 있는 중에, 이웃나라로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국의
자세를 국제사회에 어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북·중관계소속통에게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신협정의 대북지원책은 다음과 같은
골자로 되어 있다.



1. 앞으로 5년간 매년 양곡 50만톤, 석유 120만톤, 석탄 150만톤을 제공한다.


2. 식량, 석유, 석탄에 관해서는 반은 무상제공, 나머지 반은 우호가격으로 거래한다.


3. 그밖의 소비재도 80%를 우호가격으로 취급을 한다.


4. 우호가격 거래 대금은 선불로 하고, 북한이 현금결제에 응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물자를 인도하지 않는다.



이 중에서 우선 눈을 끄는 것은 전략물자인 식량, 석유, 석탄의 반을 무상원조하는것과
더불어 냉전체제가 종결된 90년대 초에 중단된 [우호가격거래: 사회주의 동맹국간에
국제가격보다 싸게 거래하는 것)를 부활시킨 점이다.


원유를 예로들면, 중국은 1990년까지 국제가격의 3분의 1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북한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일본무역진흥회의 데이터(94년판 북한의 경제와 무역의
전망]에 의하면, 우호가격중단까지는 대북한 수출가격이 전체의 평균수출가격보다
오히려 높다는 역류현상이 일어나고, 게다가 이 [비우호가격화]는 다른 수출품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극단적인 외화부족에 빠져 북한의 대금지급이 지체되고, 중앙정부가 북한으로
수출하려고 해도 지방정부와 기업은 이에 응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대북한가격에 수수료가
붙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 원인이지만, 이것은 북한경제를 더한층 악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되었다.


이번의 무상공여와 우호가격의 재적용은 생산현장으로의 지불을 중앙정부가 보장함으로써
비로소 기능하는 것이다. [우호가격]의 구체적인 우대폭에 관해서 중국관계당국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중국이 이익계산없이 북한지원에 착수한 것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신협정에서 다음에 유의해야 할 점이 지원규모의 크기이다.


북한이 1995년에 수입한 원유는 약 100만톤이다. 그 태반이 중국산인데, 협정상의
년간 120만톤은 이것을 상회한다. 가령 북한이 대금을 지불할 돈이 궁하다고는 하나,
무상분의 60만톤은 보증되어 있으며, 극단적인 에너지 부족으로 숨통이 끊어지고
있는 북한경제에게는 생명을 이어주는 기름이다.


식량 50만톤도 북한의 년간 곡물총수요량 763만톤(UN인도문제국추계)의 6.5%에
필적하는 양이다. 중국정부는 이것과는 별도로 95년부터 96년에 걸쳐 30만톤의 식량원조를
실시하고 있다.


국제기구를 제외한 1국가단위로서는 최대의 원조량이며, 중국의 대북한지원의
열의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 열의를 집대성한 [경제기술협력협정]은 질과 양의 양면에서 보아 앞으로 5년간
북한경제를 밑미에서 떠받치는 [생명선]이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냉전하에 날아든 불온·괴문서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한가운데 있는 중국의 재정형편은 결코 윤택한
것은 아니다. 특히 에너지, 식량 등의 전략자원은 경제성장을 상회하는 기세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석유자원은 93년에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식량도 다음 세기에는 자급자족이
곤란하게 된다는 예측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 중국이 비장의 자원을 다 쓰면서까지 대북한 지원에 착수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의 대북한본격지원의 동기는 3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모두에서 지적한
[艮方]에 대한 공포, 즉, 말하자면 북한이 붕괴되면 중국은 한국과 같거나 그이상의
손상을 입는다는 공포감이다.


본격지원은 [북한경제는 심각하며, 캠퍼주사(강심제)정도의 원조로는 효과가 없다.
대량수혈이 필요하다]는 북경의 북한전문가가 말하는 것처럼 중국나름대로의 판단이
기초로 되어 있다.


둘째 동기는 외교전략이다. 냉전체제의 붕괴 후, 북한은 대항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분명히 대미접근 길을 모색하기시작했다. 그만큼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현격히
떨어졌다. 본격지원부활은 평양을 북경에 매어둘려는 로우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 번째의 요소로써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중·북관계 그 자체이다. 앞의
두가지 동기에 관해서는 중국의 유사시대응문제와 관련해서 후술하겠다. 여기에서는
[혈맹으로 맺은 형제국], [순치의 관계]라며 최대한의 찬사를 보내고 있던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이 몇 년간에 그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는가를 검토하겠다.


중국과 북한간에 예사롭지 않는 군열을 새긴 것은 물론 92년 8월 24일의 한중국교수립이다.
같은 날에 당시 한국의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의 전기침외교부장이 북경에서 조인한
공동성명은 겨우 6항목이라는 간단한 것으로,


[양국의 수교가 한반도와 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한다]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라고 주창했다.


그러나, 그후의 전개는 한반도의 안정은 고사하고, 전년인 91년부터 시작한 일-북국교정상화교섭의
좌절(92년 11월), 남북총리회담의 결렬(동년 12월), 북한의 핵무기개발의혹을 둘러싼
긴장격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한·중수교와 이들 현상의 인과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중수교가
한반도정세에 초특급의 지각변동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애당초 한·중수교에 대한 북한의 표면적인 반응은 [정관]하는 자세였다. [꺼림직한
침묵]이라고 형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80년대말, 동유럽제국을 석권한 개혁과 민주화의 태풍의 선두주자로, 헝가리가
한국과 구교를 수립했을 때, 북한외교부 대변인은 [헝가리의 배신행위에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90년의 구소련과 한국과의 전격적인 국교정상화에도,
[북·소동맹조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 동맹관계에 의존하고 있던 약간의 무기도
자신을 위해 조달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김영남 외교부장의 말처럼
독자적으로 핵개발할 의향까지 비추면서 반발했다.


이에 대하여 92년의 한·중수교시는 공식성명도 발표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비공식
반응이 전해 왔다. 이것은 필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고관이 한 발언이다.


[한·중수교문제는 이미 우리의 외교정책에 반영되어 있고, 현실적로 대응해 간다]


[92년 가을에 김일성주석이 방중했을 때 한·중관계의 추진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들었다.]


분명히, 김일성은 92년 10월4일부터 15일까지 중국을 공식방문하여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외교전문가 사이에서는 의식의 화려함과는 반대로, 성과가 빈약한 방중이라고
말했다. 가령, 한국과 국교수립에 관해서 [충분한 설명]이 있었다고 하더래도, 김일성이
납득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김일성의 방중은 결국 결렬로 끝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한·중수교이후의 북한의 꺼림직한 침묵은 대국·중국과의 일정한 우호관계없이는
국가가 존립하는 것이 위태롭게 되는 소국의 비애와 배신한 중국에 대한 분노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중국과 북한의 요인왕래는 지방수준을 제외하면 잠깐동안 단절되고, 다음해인
93년에 들어가자, 중·북국경지대에서 총격사건이 있었다는 등 불온한 미확인정보가
잡자기 흘러들게 되었다.


이야기는 약간 빗나가지만, 정보통제 그 자체가 국가운영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
있는 북한의 내부사정불명에는 정평(?)이 있지만, 개혁.개방정책을 내건 중국의 입장에서도
정보면에서는 변함없이 [죽의 장막]을 친 그대로다. 정보관제방식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중·북 2국간의 관계이고 보면, 결국 실태불명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당연한 결과로, 중·북관계에 관계된 [서방측보도]는 억측·추측에 불과하다.


더구나 모략정보가 난무했고,. 양국이 험악도를 증폭시킨 93년은 특히 괴정보가
돌아다녔다.


동년 4월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북경발로 보도한 [중·북국경에서 북한병사가
중국측에게 발포하여 수명을 사망시켰다]라는 기사도 그중의 하나다. 발포사건에
관해서는 중-북양국외에 미국무성도 부정했다.


당시 보도중에서 필자가 지극히 신뢰성이 높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홍콩의 중국계
월간지 [경보]6월호가 게재한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을 겨듭 표명]이라는
기사이다. 북경으로부터의 비밀정보를 소화하지 못하고 그저 나열했기 때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요점을 정리한 다음에 소개하겠다.


[서방제국은 중국이 북한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이용하여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도록 설득하려고 하고 있으나, 중·북관계는 매일같이 긴장을 더하고 있다.
실제, 한중국교수립후, 북한은 중국의 대외정책에 공격을 가하고, 북경의 북한대사관직원은
중국의 정부, 당간부에게 중국의 정책을 비방하는 팜플렛을 보내고, 한중수교에 대항하기
위해서 북한은 대만과의 정치관계를 진전시킬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이해 3월, NPT탈퇴를 선언했다. [경보]의 기사는 중국이 국제여론의 기대에
응하여 북한을 설득해 보았다는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5월 10일, 강택민 국가주석은 김일성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국의
원칙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중국은 긴장과 대립을 초래하는 모든 행동에
반대하며,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희망한다. 한반도의 비핵화를 원하고 있으며,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미핵무기도 없애야 한다. 남북한쌍방의 대화를 통해서 문제해결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북한도 재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5월 13일, 김일성의 특사가 방중하여 강택민주석과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정관근당정치국원과 오학겸 전 외교부장이 만나, 겨듭해서 중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오학겸은 중·북 양국인민의 관계를 손상시키는 행동을 취하지 않도록
북한에게 요구했다. 정관근은 중-북양당관계가 악화되는 정세에 있다고 전제한 다음,
중국공산당 및 정부에 대한 비방을 중지하고, 북경과 중·북 국경지대에서의 중국내정에
대한 간섭활동을 즉각 중지하도록 해달라고 지적했다.]


본래, 핵문제에 관한 소동이 일전하여 2국간 문제에서의 응수로 된 상황이 손에
잡힐듯이 전해 온다. [비방], [내정간섭]의 구체적인 내용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국경부근을 중심으로 북한에 의한 위협발포나 정보교란공작등이 빈발했던 것을 보고,
미니냉전상태에 돌입해 있다는 것이 실태이다.



김일성의 죽음으로 일전, 북·중 우호연출 미니냉전은 심각도를 심화시켜 간다.
그것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 94년 4월에 북한이 외교부성명을 통해 발표한 [휴전협정을
대신하는 평화보장체계수립교섭의 대미제안]과 다음해 5월에 일방적으로 통고한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북한인민군 판문점대표부의 설치]이다.


북한은 6월 상순, 휴전협정의 서명당사자로 휴전위원회에 대표단을 보내고 있는
중국에게 최공총참모장(현 인민무력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대표단을 파견한다.
당시의 중국측 보도를 살펴보면, [중·북 양국이 피로 뭉쳐진 친선은 불패이다. 장만년총참모장의
말), [중·북 양국은 순치의 관계에 있다. 친선적인 우방, 강택민주석] 등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상투구를 총동원하여 최대한의 우호무드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상태는 완전히 반대로, [북한측이 휴전위원회로부터 중국대표단을
철수하도록 재촉한 것에 대하여 중국측은 휴전협정은 유효하다고 격결하게 반발했다.
양군의 최고수뇌상호간에 마주잡고 싸우는 대격론이 벌어졌다. 북경의 군사당국).
이즈음이 [중·북관계의 최악기였다고 한다.


물밑에서 진행하고 있던 중·북냉전을 화해로 전환시킨 것이 7월 8일의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이었다.


강택민 국가주석, 이붕 수상, 교석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의 연명으로 김일성의
죽음이 발표된 7월 9일, 다음과 같은 조전을 쳤다.



[김일성동지는 중·북양국인민간의 전통적인 친선을 일관해서 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커다란 배려를 기울리고, 중국의 혁명가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어 중·북
양국관계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다. 중국인민은 영원히 김일성동지를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조선인민이 김일성동지의 의지를 이어받고,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 주변을 견고하게 단결하여 자기 조국을 휼륭하게 건설하여
한반도의 강고한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계속 전진할 것을 굳게 믿고 있다]



중국은 그 이전부터 김정일의 생일에 축전을 보내는 등 북한의 권력세습을 시인하는
태도를 표명해왔지만,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것과 같은 표현은 물론 처음이며,
재빨리 후계체제를 인지한 것이다.


중국의 이와 같은 재빠른 대응은 김일성사망으로 북경으로 그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중·북관계가 최악상태에 있는 가운데, 중국은
북한정권의 안정을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사망을 경계로 해서 중·북 양국의 인적, 물적왕래가 급증하고 있다.
95년말까지 중국은 서너개에 가까운 대표단을 파견하고, 북한도 10개이상의 대표단을
방중시켰다. 쌍방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비난한 판문점의 군사휴전위원회으로부터의
중국대표단 철수문제에서도 북한의 안호경 외교부부장이 8월말에 정부특사로 방중하여,
군사휴전위원회로부터 중국대표단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실제로 철수한 것은 95년말이었다.
중국측의 일방적인 양보였다. 중국으로부터 북한을 향한 물자가 급증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한·중수교에서 김일성사망에 이르는 중·북간의 미니냉전은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반도미니유사시]였다. 이 격동의 기간을 통하여 중국은 한반도유사시에
중-북간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미리 학습한 것으로 된다. 96년의 [경제기술협력협정]원조를
중국의 유사학습의 대상으로 표현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중·북관계는 크게 변질했다. 냉전시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위에 성립해
있던 [형제]의 유대는 끊어지고, 자국의 안전보장상 무시할 수 없는 성가신 이웃이라는
입장이다. 게다가, 중국에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이웃이 생겼다. 자연히 중국의
한반도정책은 [남·북한등거리]정책이 될 수밖에 없으며, 거북한 외교가 강요되고
있다.


중국의 이붕수상은 김일성사후인 94년 10월 31일부터 한국을 방문했다. 같은 날밤의
북경방송은 방중해 있던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대표단과 강택민
국가주석의 회견을 톱기사로 다루어 이붕수상의 방한은 2번째로 보도했다. 눈물겹도록
배려한 것이다. 북경의 중·북관계당국의 정보로는 중국측은 강택민 주석의 방한보다
상당히 이른 봄쯤에 10월10일의 북한노동당 창건 50주년기념식에 맞추어 강주석 자신이
평양을 공식방문할 의향임을 전하고 있다. 북한측은 그후의 수해발생도 있어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해 왔지만], 강주석은 10월 6일에 북경의 북한대사관에서 개최된 노동당
50주년 축하회에 정부·당의 요인 88명을 동반하고 출석하여, [북한중시]자세를 솔선해서
어필했다. 한국방문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의리를 다해 중·북우호를 최대한 연출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95년 가을의 강택민의 한국방문에는 중국 원수의 방한에 강한 불쾌감을 가진 북한이
[대만카드]를 사용하여 중국을 뒤흔들었다는 여담도 있다. 대만의 신문과 중국측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북한의 [대만카드]는 강주석의 한국방문에 불만을 터뜨리는 형태로
대만경제부부장 또는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초청하고, 연락사무소의 상호설치
등을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때마침 대만의 이등휘총통의 방미를 계기로 미·중,
중·대관계가 긴장해 있던 시기이며, 북한이 대만대표단의 초청을 강행했다면, 중국외교에
대타격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의 게릴라외교는 중국으로부터 3천만원의 북한수해대책긴급원조(10월
5일발표), 북한대사관에서의 노동당창당 50주년 축하회에의 강주석의 참석이라는
전과를 올렸던 곳에서 중단되었다.


10월 14일에는 북한의 최우진 외교부부장이 북경에 들어가 [대만대표단의 초청중지]를
통고함과 동시에 [중국정부의 잇다른 우호적인 조치를 평가]하고, 정식으로 손을
썼다. 북·대 쌍방은 경제교류를 위한 방문단을 교환, 개선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경제기술협력협정]에 의한 북·중 와해의 영향을 입은 것이며, 중국이 용인한 틀안에서의
관계수립에 멈출 것이 확실하다.


하여튼, 중·북에 [동맹관계]적인 면모는 없다. 양축을 한국과 북한에게 당겨져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인이라는 것이 중국과 한반도의 현재의 풍경이다.



밀봉된 유사시 대응책에 접근하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유사]는 있어서는 않되는 시나리오인 것을 모두에서 지적했다.


그러나, 중국이 만일의 경우를 상정한 대응책을 다듬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마 중국의 권력구조가 집중하는 북경의 중남해와 인민해방군총참모부에
밀봉되어 있을 [유사대응책]이란 어떤 것일까. 여기에서는 중-북간의 군사동맹조약인
[중·조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에 관게된 움직임을 통하여 그 최고기밀에 접근해 보았다.


1961년 7월 11일에 주은래 중국수상과 김일성 북한수상(당시)가 서명한 조약의
핵심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제1조: 중·북 양국은 아시아 및 전세계의 평화와 각국인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전력을 다한다.


제2조: 쌍방은 공동으로 일체의 조치를 취하여 체약국 쌍방 어느 쪽이 일방에
대한 어느 나라의 침략도 방지한다. 체약국의 일방이 어느 한 나라, 혹은 수개국
연합군의 무력공격을 받아 전쟁상태에 빠진 경우는 체약국은 전력을 다해 군사 및
그밖의 원조를 제공한다.


제3조: 체약국은 쌍방 어느 쪽에 적대하는 어떤 동맹도 체결하지 않고 또한 어느
쪽에도 반대하는 그 어떤 국가블럭 내지 행동조치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제4조 제5조 제6조 생략)



제7조: 본조약은 쌍방이 수정 혹은 종결에 관해서 합의하지 않는 한 유효하다.


북한은 1961년 7월 중·북조약을 체결하기 5일전에 소련과도 그와같은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양조약이 체결된 61년 당시는 미·소냉전구조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어있었고,
더구나 중·소대립도 격화일로를 걷는 복잡한 국제정세하에 있었다. 한편, 엄격하게
대랍하는 한국에서는 61년 5월 군사혁명이 일어나 박정희군사정권이 탄생했다.


중소분쟁 와중에 북한이 양국과 체결한 조약은 사회주의진영의 상호원조라는 대의하에서
중소와의 균형외교를 유지하여 한국(나아가 주한미군)에 대항하는 것이며, 명백한
군사동맹이었다.


다만, 이 두 개의 조약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조·소조약이 [본조약은 10년간
효력을 가지고, 만일 체약쌍방중 일방이 기간만료 1년전에 조약폐기의 희망을 성명하지않는
경우, 본조약은 계속해서 5년간 효력을 가지고, 이 규정에 따라 연장된다]라는 개정조항이
있는데 대해, 중·북간의 조약은 [제7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쌍방의 합의가
없이는 개정도 종결도 없는 영구조약이라는 점이다.


그후에 국제정세는 일변했다. 냉전구조는 붕괴하고, 사회주의진영의 맹주였던
소련자체도 소멸했다. 중·북이 함께 가상적으로 했던 한국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경제를 축으로 매년 긴밀도를 심화시키고 있다. 소·조조약을 계승한 러시아는 5년마다의
조약기한 만료에 해당하는 96년,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대신하는 신조약체결교섭에
들어가 군사지원조항의 삭제는 확실한 상황이다. 중·북조약은 더이상 냉전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그 영구성은 지금도 중국을 속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반도유사시에 중국에 의한 무력개입의 가능성]이 때때로 논의의
초점이 된다.


물론 조약이 유효인한 그 가능성은 제로는아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강택민정권은
북한에 군사개입할 의지는 전혀 없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중·북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과 관련한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발언은 지극히 적다.
그의 주된 것을 열거해 보겠다.


한·중이 국교를 수립한 92년 8월 24일, 중국외교부의 오달민보도국장의 기자회견발언:
[북한과는 종래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중·조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포함한 양국간의
조약, 협정을 개정할 생각은 없다. 평화공존 5원칙하에, 선린우호관계를 발전시킨다]


강택민국가주석의 방한시인 95년 11월 14일, 중국외교부의 진건보도국장의 기자회견발언: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중국은 조약의 자동군사개입조항에 따라 파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 조약은 파병조약이 아니다.]



공식적인 발언은 아니지만, 앞에서 소개한 홍콩지 [경보]는 93년 5월 17일에 중국정부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훼손하는 남북한 어느 쪽의 군사행동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균형을 손상시킬 염려가 있는 무기, 장비를 북한으로 수출하지
않는다. 북한이 먼저 외국의 침략 혹은 외국의 지지하에서 침략을 받았을 경우, 중국은
북한을 지지한다.]


이 3항목에서 추측할 수 있는 중국의 [유사대응]은 [조약은 유지하지만 가령 전쟁이
일어나도 파병은 하지 않는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았을 경우는 직접적인
군사개입이외의 물자공여, 외교원조 등을 실시한다. 그러나, 무기는 일정한 틀내에서만
제공한다.]라고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조약 제2조의 [군사 및 그밖의 원조]중에서,
[그밖의 원조]만을 남기고 [군사]를 조금씩 백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중·북조약의 기본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했을 때에만 중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이다. 북한쪽에서 공격한 경우나 그 연장으로서 전쟁상태가 되어도
지원의무는 없다. 사회주의진영의 방위라는 공통적인 목적이 있었던 냉전시대는 지원조항은
그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지만, 냉전구조가 붕괴한 현재, 북한을 공격할 나라는 없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따라서 중국군의 한반도파병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중국외교부에 가까운 북경의 중·북관계당국의 이야기다. 이것이 중국의 본심일
것이다. 한국외무부의 고관도 [중국의 이러한 해석은 비공식이지만, 한국측에 전해져
있다]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 해석통고는 [유일하게 북한공격의 가능성이 있는
한국으로의 경고라고도 받아들여진다]고 한국외무부고관이 밝혔다.


게다가 더욱 대담한 해석도 나오기 시작했다. 가령 북한이 [자기파괴작용]을 일으켜
북한국내가 대혼란에 빠져 한국이 [치안유지] [동족보호] 등의 명목으로 38도선이북에
병력을 전개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남북쌍방의 내정문제이며 중국은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북경의 중-북관계담국자가 밝혔다.



중·북국경의 이변은 어디에서



[한반도유사시]에 중국은 한반도내부의 정세이상으로 중·북국경지대의 동정에
신경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내부의 혼란이 중국으로 파급되는 것을
가장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군이 군사행동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이 국경지대일 것이다.


특히 중국은 북한으로부터의 난민유입을 방지하기 위해 병력을 국경지대에 배치할
것이라는 것이 북경주재 서방무관단의 일치된 견해이다.


압록강, 두만강(중국명, 圖們江)을 경계로 하는 중·북국경지대의 중국측 영토,
특히 길림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조선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대전전에는
간도라고 불리었고, 청조 조선왕조시대까지는 중국인, 조선인의 혼거지대로 되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북한난민이 대량으로 유입한다면, 정치적인 동요를 유발시킬뿐만 아니라
외자도입을 지렛대로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한 개방정책에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국측의 최대의 염려이다.


인민해방군의 [유사대응]의 제1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 [난민유입방지]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중-북국경지대를 관내에 가진 심양군구이다. 동군구는 5개집단군, 19개
전투사단을 가지고 69년, 87년의 2차례에 걸쳐 극동러시아군과 국경분쟁을 싸워온
군구이기도 하다. 그 심양군구에 95년경부터 조그만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서방군사당국은 확인하고 있다.


그 이변이란, [95년가을 이후 중국군은 심양, 제남, 남경, 광주, 난주, 성도의
7대군구마다 연습을 실시하고 있는데, 심양을 제외한 군구연습이 공격을 주체로 하고
있는데에 대해 심양만이 방어중심, 더구나 지금까지 대규모였던 [쾌속반응부대]를
심양군구만이 여단규모로 확대편성하여 왕성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독자적인 호칭인 [쾌속반응부대]란 헬리곱터 등의 이동수단을 작전목적지로
재빨리 전개하는 일종의 [긴급전개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중러양국은 96년까지 국경지대의
병력삭감, 불가침에 합의하여 장기적으로는 안정화로 향하고 있다.


심양군구의 이 이변은 오히려 중-북국경을 겨냥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북한에서의
쿠데타나 동난이 일어났을 경우, 국경으로 즉시 전개하여 난민유입 등의 혼란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북경의 서방측 군사당국이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연변지구의 중조양국국경지대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병사를 배치하는 훈련이
여행자 등에게 목격되고 있다. 난민유입을 상정한 작전훈련일 가능성이 높지만, 실제로
[한반도유사사태]로 되면, 발포라는 실력저지로 나올 것인가, 위협에 멈출 것인가라는
것이 신경이 쓰이는 문제이다.


[한반도유사]시에 강택민정권은 [군사개입의 의지가 전혀 없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그렇다면, 난민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제2단계는 없을 것인가.


가령, 북한내부가 혼란하여 한국이 국제사회의 이해하에 북한의 치안대책에 착수했다고하더래도,
중국은 [내정문제]로 취급하여 방관할 지도 모르겠지만, 주한미군의 북진으로 나오면,
사태는 일변한다. 중국은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일 것이다.


한편, 중국은 미국과의 직접대결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며, 그런 능력도
없다. 오히려 [유사]의 내용에 따라서는 미국과 협력하여 사태수습책을 찾을 가능성도
크다. 예를들면 UN결의 등에 의한 국제적인 부탁을 수용한 형태에서의 공동대처방식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을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미중관계가
양호상태인 것이 대전제로 된다.


역으로 사실상 사문화된 중·북조약이 숨을 틀 사태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금후의 미·중관계가 중국의 [한반도유사대응]의 방향을 결정하는 커다란 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