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속의 아가씨, 은지씨여!부디, 새해엔
복많이 받으소서.”


권규학


   丙子年! 다사다난했던 쥐띠 해가 숱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조용히 저물어 간다.


   ○○師團 ○○大隊 1내무실에는 선봉대대의 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지난 한해 동안의 서로간의 잘잘못을 반성하며 마지막 떠나는 丙子年의
X-mas 이브를 讚頌歌를 부르며 즐기고 있었고, 한쪽편에는 몇 명의 병사가 어제 받은
위문편지를 읽으며 싱글벙글, 히죽히죽 거리고들 있었다. 김상병은 연대 인사과로부터
한뭉치의 카드를 수령하여 하나하나 열심히 자신의 이름 석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카드중에 흔하디 흔한 자기의 이름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고, 同期인 이상병과 홍상병의 우편물들만이 질투가 날 정도로 많았다.
이건 정말 金海 金氏 일생일대의 망신살이요, 김상병에겐 보급계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런, 제기랄! 워쩜 요렇게도 나만 빠져 버렸당가. 에라!
기왕에 한통도 오지 않았으니, 비록 남의 것일 지언정, 살짝 기분이라도 내어보고
돌려줘야 쓰것네. 잉.”


   김상병은 언뜻, 예쁜 이름의 카드 몇 장과 소포 하나를 집어
야전잠바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리곤 한뭉치의 편지를 들고 내무실로
들어섰다. 자기의 이름이 불리어지길 기다리는 올망졸망한 눈동자들을 보며 김상병은
하나하나 카드에 씌여진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무실 여기저기에서 함성과 괴성이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했고, 모두들 자기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듯,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상병만은 고개를 좌우로 갸웃갸웃하며 이상하다는
듯이 김상병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이! 김상병, 내 소포 안 왔어?”


   “소포라니…? 무슨……”


   “응, 조금 전에 인사과에서 오병장님이 소포 온 것을 보았다면서
내게 알려주었는데, 혹시 보았나 해서…?”


   “응, 그랬어…? 그렇지만 난 모르겠는데…”


   김상병은 마치 무엇을 도둑질 하려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려 몸을 느끼며, 왠지 괜한 장난을 시작한 듯싶어 후회스러움이 앞섰다.


   “에이, 기왕지사 될대로 되라지……”


   내무실을 나온 김상병은 그 길로 P.X로 내려갔다. 오늘따라
P.X에는 한 명의 병사도 보이지 않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분위기마저도 을씨년스럽고
썰렁하기만 했다. 이것 저것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골라서 작은 탁자 위에 수북이 쌓아놓고
마악 맛을 보려는데, 오병장이 P.X 문을 밀고 들어 왔다.


   김상병은 사건(?)의 내막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때마침 옆을 지나치던 P.X 판매병 유일병이 이상한 듯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음,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모두 주워 담을 수는 없는
거야.”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오병장은 김상병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홍상병을 불러 오늘 먹은 회식비용을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편지와 소포를 고스란히
돌려주기로 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용돈을 투자하게 된 홍상병의 얼굴 표정을 보며
김상병은 미안함이 울컥 솟아 올랐으나 그냥 순간적인 장난으로 돌려버리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탁자 위에 수북이 쌓였던 茶菓가 동이 날 무렵, 홍상병이 히죽이
웃으며 한마디 말을 던졌다.


   “김상병! 오늘은 내가 편지값을 너무 비싸게 치뤘지만 언젠가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 테니 각오하라구, 알간…?”


   셋은 P.X가 떠나갈 듯한 소리로 한바탕 크게 웃고난 다음 내무실로
돌아갔다.


   丁丑年! 아니, 소띠 해의 정월 초하루, 땅거미가 엷게 깔리는
○○대대 통합막사. 형광등의 점등관이 깜박거리고 참새떼들의 조잘거림 마냥 뿜어대는
스팀의 입김이 작은 내무실 구석구석을 간지럽힐 무렵,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며
하루중 가장 즐거운 자유시간을 맞는다. 조국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관념보다는,
지금의 이 시간이 청춘행진곡을 연출하는 김상병에게는 한마디로 댓길인기라.


   “어이, 걸레 상병!”


   이상병이 김상병의 별명을 부르며 엄지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하면서
출입문 쪽을 가리킨다.


   대대 보급병 임무를 수행하는 김상병에겐 늘상 걸레라는 안좋은
별명이 붙어다녔지만 김상병은 한번도 그 별명에 대해서 싫어하거나 기분나빠 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보급병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을 때 얻게 되는 작은
보람과 함께 묘한 쾌감같은 것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토끼길같은 오솔길을 따라 지게 지고 몇십리 들어가야
보일듯 말듯한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촌놈이 군대에 들어와서 이렇게 받기 힘든 초청도
받아보고, 싫든 좋든 멋있는 號(?)를 얻게 되고 보니 촌놈 출세하기도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가 보다. 이상병이 가리키는 곳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당시의 분위기만 보아도
P.X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채, 멍하니 이상병을 쳐다보며 볼멘
질문을 던졌다.


   “어디…?”


   말없이 한참을 마주보던 이상병, 입을 180도 이상으로 삐죽거리며
다시금 P.X쪽을 가리킨다.


   “있잖아, 저기…”


   “거기가 어딘데 그래…? 응!”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주머니에 용돈이 생겼다하면
어김없이 냄새를 맡고 빈대붙는 이상병이 밉살스럽기도 했지만, 그 냄새맡는 재주만큼은
정말 대단한 소질이라고 늘상 생각해 왔던 김상병은 한번쯤 놀려 주려던 생각을 바꾸고
함께 동조하기로 했다.


   웃음을 참다못해 크게 한번 웃고 난 다음,


   “좋아! 가지 사냥개. 오늘 또 사냥개가 돈 냄새를 맡았으니
어쩔 수가 없지…”


   사냥개란 글자 그대로 이상병의 별명을 말함이다. 둘은 웃으면서
내무실을 나섰다.


   싸늘한 바깥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한양천리라고 하더니만
어두운 P.X길 50m가 고도의 긴장감을 갖게 했다. 가수 심수봉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건 정이라고” 노래했지만 軍틀맨 신분인 우리들에겐 지금 이 시간 세상에서
제일 기쁜 건 “P.X=eat”라는 대답이 나오게 만든다. 아무런 핵심 주제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 30분이 지나고 제한된 자유시간이 끝나가는 순간, 퍼진 엉덩이를 끌어당겨
부시시 일어나 중대 내무실로 복귀했다.


   “점호시작 5분전!”


   당직하사의 구령소리가 확성기의 소리보다도 더욱 크게 귓전을
때렸다. 순서도 없이 복장을 해체하고 세면장으로 달렸다. 우선 급한 건 소위(所謂)
말하는 세쪽세발(洗족洗足_이라.


   어느새 5분 전이라는 구령에서 3분이 떨어져나가 버렸고, 더더욱
행동은 급한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매일 했던 얼굴닦기도 제대로 되질 않았다.
옆을 보니 사냥개 역시 입에 개거품을 물고 바삐 손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얼핏 “정월 초하루인 오늘부터 9초소 야간근무 두 시간은
보너스로 떨어지게 되겠구나.”하고 체념하려는데 왠걸 때아닌 구세주(?),


   “김○○ 상병, 행정실로!”


   복도에 울리는 호출구호 소리가 메아리되어 귓전을 때린다.
다소 느긋한 동작으로 하던 동작을 마무리하고 행정실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오늘
일직사관은 마음씨 좋은 최중사님이 아니던가!


   “상병 김○○, 일직사관님께 불려 왔습니다.”


   “어이, 김상병! 애인 편지……?”


   환하게 웃는 일직사관 최중사로부터 예쁜 꽃 한송이가 장식된
꽃편지 한통을 전해 받았다.


   “서울시 ○○구 ○○동 ○○번지 -최은지-”


   섬섬옥수로 써내려간 낯설은 편지 한 통,


   “이게 왠일인가? 나에게 아가씨가 편지를 다 보내 오다니……”


   예쁜 얼굴, 고운 말씨, 그리고 수줍어하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상으로서 동화속의 백설공주를 연상케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씬 도대체
누구이길래…? 아가씨에게 편지를 받자 졸지에 스타 아닌 스타(?) 취급을 받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역시 난 출세를 하긴 했나 보다” 하면서 연신 싱글벙글하고
있는데, 덧붙이는 오병장과 홍상병의 반주는 더더욱 들뜬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었다.
내일은 사단에서 음어능력 측정을 하기 때문에 모처럼 야근 허락을 받고 음어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때아닌 편지 한 통 때문에 제대로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실제로 편지를 받은 당사자인 김상병보다
관심의 농도가 짙은 오병장과 홍상병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보였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했다. -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지만
- 아무튼 기분좋은 그 순간을 꼭 접어 마음 한구석에 간직해 두고 음어연습을 계속하려
했으나, 뭔가 이상하다는 의구심만은 염두에서 떠나질 않았다.


   “야! 김상병 부러운데……”


   이러한 부러움의 대상으로서 하루 24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차가운 삭풍이 맨살 속까지 파고드는 정월 초이튿 날 저녘,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역사적인 대 사건(?) -김상병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의 발단은 시작되고 있었다.


   불과 이틀 전의 스타쇼를 연출케 했던 흐린 기억을 따라 또
한 통의 편지가 김상병을 찾아왔다.


   “미지의 벗에게! 지난번 친구의 소개로 첫 인사를 드린 후,
다시금 최면불구하고 문안드립니다. 병자년 한해 잘 마무리 지으시고, 정축년 소띠
해에는 뜻하시는 바 모든 소원 성취하시길 빕니다.”


   ─ 최은지 드림 ─


   ※P.S:신년 연휴중 한번 면회갈까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꼭 귀신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 되어버린 김상병은 이런저런
생각을 수도없이 굴려보았지만 이렇다할 작은 짐작조차도 뇌리에 잡히질 않았다.
“혹시 사촌 여동생이 소개한 아가씨는 아닐까?”


   어쨌거나 ’97년 신정연휴의 마지막 날 아침은 황홀하게도
김상병의 들뜬 기분과 함께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신정연휴 휴무계획 체육행사의
일환인 족구시합에 열을 올리고 있을 즈음, 스피커를 타고 냉랭히 울려 퍼진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 방송,


   “상병 김○○, 면회왔으니 준비하시고 행정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서둘러 옷매무시를 고쳐 입고 행정실로 달려갔다. 면회일지에
또렷하게 기록되어진 이름 석자,


   ‘최은지’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동안의 궁금증을 밝힐 수가 있겠구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굴리며 면회신고를 한 후, 위병소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하는 위병조장의
말을 듣고 들뜬 기분이 되어 차가운 나무 벤취에 걸터앉아 조마조마해지는 가슴을
애써 삭혔다. 10분…, 20분…, 어느새 30분이 흘러갔다.


   또다시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과 얼핏얼핏 스치는 불안감, 그리고
당혹하리만치 온 뇌리를 감싸고 드는 의혹과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마, 처음 만나는 까닭에 부끄러워서 그런 걸 거야.”


   마음 한편으론 일말의 안도감과 함께 긍정적인 측면으로의
생각도 함께 겹쳐왔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오병장과 홍상병이 맞은 편 벤취에 앉아,
서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주고 받으며 괜히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슬쩍
위병조장에게 그들이 왜 나왔는지를 물어보니, 그들 역시 면회나왔다고 했지만 왠지
어색해 보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김상병의 자리로 옮겨 왔다. “어이, 김상병!
조금 전에 은지씨라고 하는 분이 메모지를 우리보고 전해 달라면서 주고 갔는데,
한번 보지 않을래? 아가씨가 무척 예쁘고 상냥한 타입이던데…, 김상병 그동안 내숭은
혼자서 다 떨었던 것 같애.”


   더할 수 없는 기쁨의 감정이 목구멍에서부터 떨려 나왔다.
누가 시키기도 전에 미리 정해진 순서가 있었던 것처럼 면회실 탁자위엔 음식물들이
푸짐하게 차려졌고, 예외없이 茶菓이 비용을 부담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홍상병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대신 김상병에겐 메모지를 전해주게 했다.


   “To. ○○씨! 초면에 너무 당돌한 행동을 한 것 같아서 오늘은
그만 갈까 해요. 꼭 뵙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에 더 좋은 만남이 되기를… 그리고
새해엔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처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가기를
바라겠어요. From. 은지”


   기대가 크면 실망 또한 크다고 했던가? 잔뜩 기대했던 정월
초하루의 부푼 꿈이 일거에 와르륵 하고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빙긋이 웃기만 하는 오병장,
오병장의 웃음을 따라 홍상병 역시 싱글싱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린다.


   정작 김상병의 얼굴은 태연자약했으나 오히려 토끼눈 같은
동그란 눈을 좌우로 굴리는 이상병의 표정이 더욱더 의구심을 돋구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후, 크게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내어뱉은 홍상병의 한마디가 김상병의 전신을
마치 오장육부가 뒤틀려 버릴 듯한 패배감과 허탈감에 휩싸이게 해 버렸다.


   “야, 김상병! 센스가 완전히 고인돌이구만! 역시 군인에겐
아가씨가 만병통치약이야, 안그래…?”


   홍상병의 야리꾸레한 벨이 틀리는 말 한마디에 이상한 기분이
되어 다시 한번 메모지를 확인한 순간, “아차, 그랬었구나!”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던 백설공주의 환상이 가장 험상궂고, 보기 싫고, 짖궂게 떠오르며
지금까지의 환상속의 아름다웠던 영상들이 마귀할멈의 흉한 몰골이 되어 시야를 가려
버렸다. 영문을 몰라 좌우를 번갈아 살피는 이상병의 모습이 흡사 사냥개의 옆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김상병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피식하고 바람빠진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재밌다는 듯 오병장과 홍상병의 소름끼칠 듯한
괴기스런 웃음소리가 꺼져가는 난로의 벌린 아궁이 속으로 기어들어가듯 사라져 갔다.
김상병은 허탈한 기분으로 이미 멀리 달아나 버린 사랑에의 희망을 뒤로하고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내무실로 복귀했다. 그리곤 관물대 깊숙이 감추어둔 수양록을 꺼내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기를 썼다.


   “1997년 1월 3일, 날씨: 찜찜함. (전략)


   정축년 정월 초사흘, 오늘은 내 환상속 가장 아름다운 동화속의
연인이었던 ‘백설공주’가 홍상병을 통해 가장 험상궂은 ‘마귀할멈’, 바로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다.


   (중략)


   새해엔 이 김상병에게도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고 하는
속칭으로부터 벗어나서 ‘쨍하고 해뜰날’ 있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모쪼록
꿈속의 아가씨, 은지씨여! 부디, 새해엔 복많이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