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古代史에 대한 의문점


여운건


   1. 개요


   우리의 이웃나라인 中國은 ‘二十五史’에 의해서 그들의 선조로부터
각 나라별로 역사가 정리되어 있고, 日本도 ‘日本書紀’ 및 ‘續日本紀’라는 책으로
古代史가 정립되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역사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고 史書마다 記錄이 상이하며 序言에서 언급한 것처럼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당국의 무관심 속에 세월만 흘러 日帝로부터 우리 主權을 찾은 지 半世紀가 지나갔고
역사 학자들도 史書가 잘못되었다고 시인하면서도 올바른 역사를 세워 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우리의 古代史를 대표하는 유일한 正史인 <三國史記>가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사서이고 도가 사서(道家 史書)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하는
막연한 비평을 늘어 놓고 있으면서도 그 史書의 무엇이, 왜 잘못되었다는 구체적인
지적이 없다. 이것은 대부분의 역사학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삼국사기>는
高麗시대의 유명한 학자들 11명이 엮어놓은 史書로서 新羅, 高句麗, 百濟시대의 상세한
기록들로 인하여 日本이 조작하여 만든 2,600여 년의 日本歷史를 정당화(正當化)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로 <三國史記>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日本 학자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받아들이고 이를 전하는 우리 史學者들의 뻔뻔스런 모습들은 보기에도
흉칙스러울 뿐이다.


   또한 史書와 교과서의 내용이 다르기도 하고 재야(在野)의
많은 학자들이 古代史의 잘못된 부분을 여러 매체를 통하여 지적하고 있지만 學位를
가진 이름있는 학자들은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 民族 모두가
우리 歷史의 오류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앞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서 알고 있는 古代史의 대강을
상기하였는데 과연 무엇이 문제이며, 또 무엇이 풀어야 될 의문점인가를 먼저 살펴봄으로써
숨겨져 있는 歷史를 찾아내고 또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여러가지 의문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國家의
계보에 관련되는 사항과 領土(또는 강역)에 관한 내용을 위주로 적기로 한다.


   2. 개국사(開國史)에 관한 의문점


   ① 인접 국가인 中國의 最初의 나라는 ‘夏’로서 BC. 2205년에
창건되었고, 日本은 왜(倭)가 BC. 660년에 일어났으며 우리 古朝鮮(檀君朝鮮)은 BC.
2333년에 세워졌는데 우리 歷史가 中國 歷史에서 분파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開國年代 비교도


   ② 中國의 開國史는 <二十五史>의 史記 卷一, 五帝本紀에
‘三皇五帝’에 관한 것과 최초 국가 ‘夏’ 나라의 제왕세계(帝王世系)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고 日本도 신정시대(神政時代)에 이어 天皇계보가 제1세 신무(神武)로부터
현 天皇(平成)에 이르기까지 125代가 <日本史書>에 명기되어 있는데 우리의
최초국가인 檀君朝鮮의 왕 계보(王 系譜)는 왜 기록이 없을까?


   ③ 中國의 <二十五史>에 三皇五帝에 관한 기록이 명확히
정리되어 있고, 그들의 시조(始祖)를 헌원(軒轅, 黃帝)이라고 하여 사전 사화(史前
史話)를 갖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구리(九黎)라는 나라의 치우천자(蚩尤天子)와의
전쟁 기록이 여러 곳에 나와 있고 최근의 中國학자인 임혜상(林惠祥)이 지은 <中國民族史>
上冊 第五章에 이것을 ‘中國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간의 전쟁이며 치우(蚩尤)는 구리(九黎)
즉 묘족(苗族)의 추장’이라고 기록하였는데 구리(九黎)와 치우는 우리 歷史와 관계가
없는가? 三皇五帝에 대한 약기(略記)


   ④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檀君이 中國에서 온 기자(箕子)에게
쫓겨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와 숨어서 山神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908세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⑤ <삼국유사>에 의하면 古記를 인용하여 환인(桓因)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변신한 웅녀(熊女)와 교접하여 檀君王儉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환인은 단군왕검의 할아버지(祖父)이고 환웅은 아버지인가?


   3. 古代國家의 계보에 관한 의문점


   ⑥ 동이족(東夷族)이란 동쪽 오랑캐 족속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中國시조인 헌원(軒轅:黃帝)의 8대손인 舜(순 임금은 5帝中의 1人)을 東夷人이라고
하였는데 中國人이 자기 시조를 왜 東夷人이라고 하였을까? 또한 東夷國은 朝鮮을
말한다고 中國史書는 적고 있다.


   ⑦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新羅人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는 中國시조 黃帝의 아들)의 후예이므로 姓을 金氏로 하였다고
말하고 高句麗는 고신씨(高辛氏는 黃帝의 曾孫으로 5帝中의 1人)의 후예이므로 姓이
高氏라고 기록하였다. 과연 우리 조상과 中國人의 조상이 같은지 틀리는지?


   ⑧ 中國의 <二十五史>와 우리의 <삼국유사>에서
漢무제(武帝)가 기자를 조선에 봉(封)하였다고 하여 기자가 檀君朝鮮 모두를 통치한
것처럼 기록하고 또 기자의 후손 기준(箕準)이 연(燕)나라에서 피난온 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며 다시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으므로 檀君朝鮮은 箕子─衛滿─漢四郡으로
國家系譜가 이어졌다고 배웠는데 箕子가 朝鮮의 王을 지냈다는 史書의 기록이 없고(李朝
때에 王이라 하였음), 漢四郡의 위치도 史書와 교과서의 내용이 상이하다. 신라,
고구려, 백제 이전의 國家系譜가 어떻게 되었는가?


   ⑨ 中國史書(<二十五史>를 비롯한 모든 史書)에서 東夷國은
朝鮮이라고 記錄하면서 거기에는 高句麗, 新羅, 百濟, 倭, 加羅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상호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


   ⑩ 檀君朝鮮의 末期(BC 3세기)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일어난
BC 1세기 사이에 존재했던 옥저(동옥저, 북옥저 포함), 부여(동부여, 북부여, 졸본부여
포함), 낙랑국(樂浪國), 숙신, 읍루, 물길, 말갈, 韓(三韓) 등의 나라는 어떻게 존재하였는가?


   4. 古代 國家의 領土(또는 彊域)에 관한 의문점


   ⑪ 신채호(申采浩는 民族 史學者이며 독립투사)의 <朝鮮上古史>에서
百濟는 海洋으로 진출하여 中國의 요서, 河北, 山東, 강소, 절강성(省) 등을 검거하였고,
新羅도 복건성(省)까지 진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新羅가 百濟를 멸할
때 전쟁터는 어디였을까? 좥朝鮮上古史좦의 百濟와 新羅의 中國진출도


   ⑫ 中國학자 임혜상(林惠祥)이 쓴 <中國民族史>에서
東夷에 대한 설명 가운데 협의(狹義)의 東夷는 진(秦)나라 이전에 현 山東, 강소,
안휘성(省) 등성에서 살았고, 광의(廣義)의 東夷는 秦漢이후 판도가 확장되어 滿洲,
朝鮮, 日本, 琉球 등에서 거주한 이민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東夷國曰朝鮮이라고
하였으니 우리 조상들이 관장한 지역이 東北아세아 전부였을까? (河北省은 中國의
수도인 北京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기록에서 빼고 等省으로만 표시한 것 같다.) 좥中國民族史좦의
東夷지역도


   ⑬ 天文學 및 氣象學的 現狀기록에서 高句麗, 新羅, 百濟의
中心部가 中國대륙에 있었다고 天文學者가 발표하였다. 天文學은 어떤 판단이나 추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科學的 근거에 따라 계산으로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天文學者가 분석해도 그 결과는 같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天文學 교수인
박창범(朴昌範)을 中心으로한 몇사람이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나와
있는 天文現象 기록을 모두 모아서 이를 분석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먼저
史書에 나와 있는 高句麗, 新羅, 百濟의 天文現象 기록은 총 226회로서 이를 분류하면
다음 표와 같다.


   일식(日蝕)은 총 67회중 13회를 제외한 54회가 실현되었고
高句麗, 新羅, 百濟의 日蝕 관측지역을 모두 분석한 결과 요도와 같이 新羅는 中國의
양자강 부근, 百濟는 北京 부근, 高句麗는 그 북쪽 몽고와 시베리아 지역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지역은 바로 그 나라의 中心部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新羅의 경우는
그 말기(787년 이후)에 이르러 일식 관측 지역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바뀌었다.


   行星의 이상현상, 혜성의 출현, 유성과 운석의 낙하 등은 지금의
발달된 科學 文明시대에도 관측이 어려운 天文現象을 그 시대에 관측하여 歷史로
기록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며 天文現象 관측 시기는 기록상으로 中國보다 1400여
년이 앞섰다고 朴교수는 발표하였다.


   또 洪水(大雨)기록을 보면 新羅의 경우 총 38회가 있는데 6세기
이전에는 4, 5월에 많고(20회), 7세기 이후는 6, 7월에 집중(8회)되어 있다. 洪水
통계로 보아 5월 大雨지역은 中國의 양자강 일대 지역이므로 이 통계도 新羅가 양자강
부근에 그 中心지역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7세기 이후에는 집중 大雨시기가 7월로 바뀌므로서
그 지역은 中國 북부, 한반도 남부 및 日本의 규슈 지방으로 옮겨졌음을 볼 수 있다.


   좥新東亞좦(97년 2월)에 안영배씨의 “고대 3국의 무대는 중국
대륙이었다”는 논문에서 정용석씨(21년간 기상청에서 근무한 기상관측 전문가)는
<三國史記> 기록에서 같은 해(108년)에 新羅는 洪水로, 百濟는 6개월간 가뭄으로
백성이 굶어 죽었다는 내용을 비롯한 여러가지 예를 제시하면서 新羅와 百濟의 수도가
한반도에 없었다고 그의 저서 <중원>에서 밝히고 있으니 天文學과 氣象學에서
나온 科學的인 근거와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⑭ 人口변화 통계로 보아 百濟와 新羅의 강역은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지역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사서(新, 舊 唐書,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기록된 戶口數는 아래와 같다.


   - 高句麗 69만戶


   - 百濟 76만戶


   - 新羅首都 178,936戶(三國遺事)


   그런데 百濟가 망한 700年 후인 李朝 때 百濟 땅이었던 京畿,
忠淸, 全羅道를 합한 戶口數가 56,000戶로서 백제의 1/10에도 미달되고, 慶尙道는
49,000戶라고 <太祖實錄>에 나와 있으니 신라 수도인 경주보다도 훨씬 人口가
적다(위 통계는 統計廳 자료임). 그렇다면 百濟와 新羅는 어디에 있었는가?


   ⑮ 高句麗, 新羅, 百濟의 活動地名이 大部分 中國 대륙에서
발견되고 있으니 이 나라들의 中心部가 과연 어디였을까?


   高句麗, 新羅, 百濟의 활동 지역 가운데 89개 지명이 모두
中國 대륙에 있다. 특히 百濟의 활동지역인 석문(石門), 漢水, 진성(晋城), 高平,
광양(廣陽), 청하(淸河), 城陽, 광릉(廣陵), 東明, 덕안(德安), 치(淄), 청(靑),
래(萊), 海, 제성(諸城), 白馬河, 박성(薄城), 항성(項城), 주유성(周留城), 동성(桐城),
잠산(潛山), 독산(獨山), 사성(舒城), 평원(平原), 황산(黃山) 등 20여 개의 지명이
지금도 中國 땅에 그대로 남아서 불리워지고 있다. 특히 이중, 百濟의 마지막 싸움터였던
黃山과 白馬河가 山東省에 현존하고 있고, 百濟가 망한 뒤 당(唐)이 설치한 5개 도독부(都督府)중
東明과 德安이 지금도 있다. 그러나 韓半島에는 이러한 지명이 거의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까? ?


   <三國史記> 券 37( 雜誌 6, 地理 4)에는 “三國有名
未詳地名”(삼국유명 미상지명)이라 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땅에 있는 이름인데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지명이 무려 360여 개가 나와 있다. 勿論 우리 학자들이 그
지명에 토를 달아서 한반도의 어디라고 한 것도 있다. 그런데 古地圖를 통해서 이
未詳 地名을 추적해 본 결과 20여 개의 지명을 中國 땅에서 찾을 수 있다. 적은 한반도
내에서 三國의 바로 후속국가인 高麗의 學者들이 그렇게 많은 지명의 위치를 왜 몰랐을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李朝時代의 주요활동 지명 360여 개를 모른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三國 未詳地名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中國 땅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거기가 바로 三國의 歷史 현장이 아니었을까?


   ? 三國시대 이전의 歷史의 人物이 활동한 지역이 모두 中國
대륙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함이 옳은가?


   앞에서 言及한 中國의 시조 黃帝(헌원)와 구리(九黎)의 치우천자(蚩尤天子)가
싸운 곳이 中國의 北京 근처인 탁록이며 치우천자의 묘가 역시 中國의 山東省에 있다.


   新羅人의 선조이며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조상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중국 양자강 부근의 청양(淸陽)에서 활동하였고, 그의 능은 山東省의 곡부에 있다.


   高句麗의 高氏의 先祖인 고신씨(高辛氏)의 묘는 中國 河南省의
東郡에 있다.


   檀君朝鮮 시대에 朝鮮에서 살았다는 기자(箕子)가 살던 곳은
中國 河南省의 서화(西華)이며 거기에 기자대(箕子台)가 있고, 기자의 묘는 안휘성(安徽省)의
몽현(蒙縣)이라고 中國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高句麗의 모본왕(慕本王)과 보장왕(寶藏王) 때의 전쟁지역이
北平과 太原 부근이다.


   新羅 승 김교각의 절, 장보고의 법화원, 김유신의 전쟁지역,
최치원의 활동 지역이 모두 中國 대륙이다.


   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융(夫餘隆)의 묘비가 中國
개봉(開封)에 있다.


   ? 三國 時代의 조공(朝貢) 및 사신(使臣)의 왕래 기록을 보면
李朝시대에 한반도에서 中國의 首都(北京)까지 41일(신의주에서)과 2개월 반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高句麗, 新羅, 百濟에서 梁, 北齊, 晋, 隨, 唐나라에 가는데 출발해서
도착까지 모두 1개월 이내로 기록되어 있으니 三國의 수도는 한반도보다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을까?


   ? 高句麗의 乙支文德 將軍이 612年에 隨나라의 113万 大軍을
살수(薩水)에서 물리친 전쟁 기록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歷史中의 하나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에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中國의 史書에 좀 남아 있으나 없어져
이를 듣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럴 수가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三國有名未詳地名’에 이 대첩(大捷) 장소인
살수(薩水)가 들어 있다. 歷史 해설자는 薩水는 청천강(淸川江)이라고 명확하게 기록하였는데
유명한 전쟁 장소가 살수이고 살수가 바로 청천강이었다면 어떻게 살수를 알 수 없는
미상 지명이라고 하였을까? 살수대전은 612年에 있었고, <三國史記>는 1145년에
편찬되었는데 약 500년 전의 역사라면 口傳으로도 알려질 수 있는 역사가 아닌가.
혹시 살수가 한반도 아닌 중국 땅이 아니었을까?


   ? 660年, 百濟가 패망하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부하 3万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을 공격하여 百濟의 200여 城을 회복하였다고 하였고, 663年에
백제의 王子인 부여풍(夫餘豊)은 百濟의 古將인 복신(福信) 등과 웅진성(熊津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니 당군(唐軍) 40万名이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러 웅진성으로 향하여
신라군과 함께 공격하였다고 <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百濟의 모든 城을, 다시 백제는 본래 二百城에 있다
하였는데 百濟가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또 660年에 唐軍 13万名이 百濟를
쳤고 또 663年에 40万名이 德物島(해설자는 德積島라고 기록하였음)를 거쳐 百濟軍을
쳤다는데 그 당시의 唐나라가 바다를 통하여 이렇게 많은 병력을 수송할 능력이 있었을까?
현대전의 仁川上陸作戰과 비교할 때 가능한 얘기인가? 과연 백제의 위치가 부여땅이었을까?


   5. 의문점의 解決


   위와 같은 여러가지 의문점이 史書의 기록과 科學的인 분석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으니 國家系譜와 領土의 범위 및 위치 등을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다음에 토의하는 내용은 이러한 의문점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것이 중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