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치판과 [용의 눈물]
박한남
이즈음처럼 '용'이 우리의 눈과 귀를 집중시킨 적은 없었을
것이다. 자고 나면 9룡이니, 8룡이니 (6월 19일 한 용이 인간의 자리로 회귀하였기
때문에 7룡이 되었지만) 하는 말이 신문 지면의 곳곳을 독점한 지가 거의 6개월이나
된다. 하나 밖에 허용되지 않는 현대판 '용의 자리'를 얻겠다고 여당의 대권주자들이
우리 독자들의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KBS 대하사극 '용의 눈물’
또한 또다른 용으로서 우리를 즐겁게 해 주고 있다. 지난 가을 한동안 ’애인 신드롬’으로
많은 기혼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모 탈랜트가 이제는 용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아버지 용, 동생 용 등 여러 용들의 피와 눈물을 뺏는 비정한 ’차세대 용’으로
변신하여 뭇 남성들의 스타로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정치판과 TV에서 온통
’용’들이 설치고 있으니 이러한 관심에 부응하여 모업체에서는 용무늬의 졸바지를
만들어 여성들에게 직접 용을 입히겠다고 한다.
드라마 [용의 눈물]과 그 의미
[용의 눈물]은 조선 태조 이성계로부터 제4대 세종대왕에 이르기까지의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그 정착 과정에 나타나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그리고 있는 한 방송국의 대하드라마 제목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현재의
정치판과 연결되어 신문에 그 줄거리가 나오고 여러 교수들의 견해와 출연진에 대한
동정이 다투어 실리고 있다. 정치판의 7룡 못지않게 그 주가는 날로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작명을 잘한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용의 눈물]은 원래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 1901 ∼1981)님의 역사소설 ‘세종대왕’을 극화한 것이라고 한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장장 8년간 2,456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역사소설이
이제 시청자용으로 각색되어 일주일에 두 번씩 방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종전의 대하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출연자들의 연기력과
노력 등 여러 요인이 많겠으나 과감한 제작비의 투자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더욱이 중간중간 해설자의 설명은 시청자로 하여금
그 역사성을 혼돈할 정도로 신뢰감을 주고 있다. 설령 인조된 사실이라 할지라도
예를 들면, 방석의 첫째비 유씨와 이내관과의 불륜을 둘러싼 정치적 음모, 강비와
민씨간의 고부관계를 뛰어넘는 여성 상호간의 질투심과 이성계나 이방원보다도 더
예리한 정치적 안목과 실권 행사, 이방원의 순종형 첩 덕실의 등장, 그 비서 전 궁인
김씨의 당찰정도의 충성스러운 모습, 그리고 백미라할 수 있는 정도전의 의연한 최후의
모습… 이들 인조된 양념들은 충분히 제 맛을 내면서 實錄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보다도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많은 시청자들의 주말 심야시간을 잡아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 건국의 실제 총 감독이었던 삼봉 정도전(1337-1398)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되게 된 것은 이 드라마의 공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제1차의 난 때 이방원에 패함으로써 그 역사적 소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천재, 아니 실질적인 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왕조
역대왕들의 집무실이요 살림집이었던 경복궁의 정문부터 부속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정도전에 의해 그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그에 의해 탄생된 조선에
대한 애정은 아직도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그는 내우외환에 허우적 거리는 고려왕조의
말기모습을 체험하며 이를 치유하기 위한 정치·경제·군사·사상 다방면에 걸친
처방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 처방전을 한꺼번에 쓰기에는 환자의 건강상태가
최악에 이르렀다고 본 그는 결국 고려왕조를 안락사시키면서까지 새로운 시험관 아기,
신권중심의 유교적 이상사회로의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여말 여러 전쟁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국가의 공병이 아니라 최영이나 이성계 등 각 원수들이 개인적으로 기르던 사병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고 있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가장 강력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던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수많은 사병들을 갖고 있는 신료들이 연합하여 들고 일어난다면
이제막 태어난 조선은 그 성장을 멈출 수밖에 없었으며 비록 이 계획은 그의 죽음을
재촉하게 되었지만 이렇기 때문에 정도전은 사병혁파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렇듯 정도전은 이성계를 전면에 내세워 영원히 국내외 누구에게도 도전받지
않을 강력한 국가건설을 추진하려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의 건국에 있어 이방원 역시 정도전 못지 않게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이라는 반란을 도모할 당시 이방원은
그의 어머니 한씨와 둘째어머니 강씨 및 가족들을 인솔하여 이성계의 본거지인 동북면을
향하여 피신함으로써 역적의 가족을 인질로 삼으려 했던 최영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으며, 한편으로는 곳곳에 흩어져 있던 가병들을 모아 아버지의 거사에 내응할 만만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원은 용이 되려는 아버지의 야망을 위해서
‘정몽주 살해’라는 극약처방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양왕 말기 비록 당시 군사
실권은 이미 아버지와 그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정몽주는 조정의 여론을 장악하여
조선 건국의 명분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이성계의 야망을 꺾으려 했던 보수파의 거목이었다.
공양왕 3년 가을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 동조세력에 대한 정몽주의
반격은 종전과 달리 매우 강력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결과 이성계의 브레인 역할을
하였던 정도전·조반·조준·남은·남재·조박·윤소종·오사충 등의 급진파 사대부들이
정몽주 세력에 의해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거나 멀리 유배되는 등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무’가 강하다 할지라도 ‘문’이 뭉쳐 ‘명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성계의 왕조 창출의 계획은 수많은 반란 사건의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이방원은 아버지 병문안을 (실제로는 이성계의
동정을 살피려 온)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와의 마지막 협상이 결렬되자 숨도 돌릴
틈 없이 선죽교 위에서 정몽주를 죽이고 만 것이다.
이방원의 아버지 용 만들기에 대한 공헌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가 용이 된 이후에도 두문동 72현이나 고려왕씨 등 도전세력 내지 도전가능성이
있는 세력에 대하여 주저하는 아버지를 달래 철처한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용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 대한 보람도 없이
둘째 어머니 강비와 정도전의 야망은 이방원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철저히 그를 소외시켰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와 자신이 목숨걸고 세운 조선왕조가 한 여자의 치맛바람에
의해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방원의 능력과 야망을 익히 알고 있는 정도전은 그가
세운 재상중심의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군주의 출현을 갈망했던 바 이것은 건국에 공이 큰 본처 자식들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던 강비의 소망과도 맞아 떨어져 결국 오랜 동안 이방원은 토사구팽의 위치로
추락하며 칼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강비가 위암으로 먼저 죽고 강비
중심으로 짜졌던 정계 판도에 변화가 있게 되자 결국 정도전과 이방원의 피흘림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이방원이 드디어 제1, 2차 난을 통해 자신을 구심점으로 하는
‘판쓸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성계라는 용의 눈물과 원한을 쌓게하고 있다.
이후에도 이방원은 강력한 군주가 온전히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피의
응징을 계속하였다. 왕권을 우습게 보거나 왕권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자에게
대한 응징이었다. 건방진 공신들에 대한 가차없는 처벌은 민무질·민무구 등 처남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 그는 제대로된 후계자를 세우기 위하여 첫째 둘째 아들들의
희생도 주저하지 않았다. 비정하리만치 냉혹한 태종의 피와 눈물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주로서 전통문화의 꽃을 피운 세종대왕대의 태평성대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스승인 세종대왕은 바로 그 아버지의 집요하고도
원대한 피와 눈물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대 용들의 피와 눈물을 알아서인가 세종대
지은 ‘용비어천가’에서 임금이 된다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하여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이렇게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후대
임금은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경계를 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소위 용에 비유되는 인사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떠한 사회를
잉태하고자 함인가.
[용]의 모습과 의미
용은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신령스럽게 여겨오는 동물로
신화나 전설, 그리고 민간신앙의 대상으로도 큰 몫을 차지해 왔다. 한편 용의 순수한
우리말은 ‘미르’로서 ‘물’의 옛말이요 달리 ‘미래’와도 관련져 있다. 실제
불가에서는 과거불을 비바시불, 현세불을 석가모니, 미래불을 미륵불이라하여 현세에
풀 수 없는 소망을 가진 자들의 신앙의 대상이요 희망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한 용은 일찍이 중국인들이 상상하였던
용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중국의 문헌에 보면, ‘용은 인충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과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그 중에는 81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목아래에는거꾸로 박힌
비늘(역린)이 있고 머리 위에는 博山이 있다’라고 하여 용에는 각 동물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추고 그 조화 능력은 무궁무진한 것으로 믿어져 왔다. 이와
같은 초월성으로 용은 왕이나 훌륭한 존재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착한
신에 비유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결코 상상 속의 용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7용이라 불리는 이들은 결코 용이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또 과거 우리 조상들이
용이 되기 위해 흘렸던 그와 같은 피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오지 않았던가. 이제 이들이 용이 못된 이무기가 될지라도
여진히 그들에게 땀을 요구하고자 한다. 물론 그 땀은 일신의 영광을 위한 땀이 아니기를
빈다. 인간은 결코 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시대 이 민족이 가장 필요로하는
땀을 흘리는 종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지닌 지성과 경륜이 무색할 정도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데 소모할 것이 아니라 무너져버린 우리의 경제력을 치유하는, 불신과 비리의 소굴이
된 정치판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순수함을, 피죽도 먹지 못하는 북한의
형제를 앉혀 세울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일군이 되기를 바란다. 자신을 용이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조국이 용처럼 웅비할 수 있도록 경제력을 회복하는데 하나의
초석으로서 제자리를 지켜야 할 것이다. 과거 우리 왕들의 용트림이 신권에 대항한
강력한 군주국가 건설에 있었다면 이제 우리의 지도자는 그 능력을 필요로하는 자리에
인재를 배치하여 국가운영을 맡기고 밖으로는 선심이나 쓰는 졸부의 모습이 아니라
대외 경제력을 통해 실리를 추구하여 그 이윤을 국내 복지시설과 산업경제에 재투자하는
비젼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다시는 TV드라마와 우리의 정치판이 같다는 자조적인
푸념이 없도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