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책(史書) 소개
여운건
개 요
歷史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바, 유적(遺蹟), 유물(遺物), 풍습, 전통, 체형, 혈통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수단은 기록(記錄)에 의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숨겨진 歷史를 밝히는 것도 대부분 사서의 내용을 분석, 비교하여 결론으로 유도되기 때문에 근거사서(根據史書)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오게 되므로 독자들에게 미리 史書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言及한 것처럼 中國이나 日本의 正史는 前後가 분명하게 편찬되어 있고, 기타 史書들은 正史를 보완하는 정도로 볼 수 있는데 비하여 우리 史書는 역사 말살(抹殺)정책과 전란(戰亂)으로 인한 소실이 너무 많아 현존하고 있는 古代史書는 몇 종류에 불과하다. 대단히 유감스럽고 아쉬운 일이지만 이러한 사실 자체가 우리의 歷史이므로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韓國) 史書 우리 古代史에 관한 史書는 가히 수십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근거자료로 제시된 史書만을 열거하여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古代史書는 이미 소실되어 없어지고 개인의 필사본(筆寫本)이나 타 사서에 引用된 부분적인 내용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개되는 史書中 韓國 고유의 사서는 서희건(徐熙乾\) 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를 참고하였고, 中國史書는 <二十五史> 위주로 설명하려고 한다.
韓國의 史書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李朝 때부터 戰亂에 의한 소실과 의도적인 왜곡으로 인하여 古代史書가 없어지고 日帝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50여 종의 史書가 소각되었으니 現存하고 있는 몇권의 사서도 어렵게 보존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 표에 제시한 韓國史書는 本硏究內容을 소개하는데 여러가지로 參考한 史書이고 이외에도 李相時 著 <단군실사에 대한 고증연구>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삼국사기> 이전에 기록된 檀君 관계 史書는 <檀君記>, <海東古記>, <仙史>, <表訓天詞>, <道證記>, <動天錄>, <地華錄>, <古朝鮮秘記>, <誌公記>, <四聞錄>, <北夫餘記>, <迦葉原夫餘記\> 등이 있었는데 일부 필사본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많은 史書中 현존하고 있고, 또 正史로 인정된 사서는 <三國史記>인데 여기에는 檀君朝鮮에 관한 기록은 없고 다만 <三國遺事>에 1매 정도 나와 있을 뿐이다. 우리 古代史書에 대한 學者들의 위서시비(僞書是非) 현존하고 있는 古代史書가운데 檀君朝鮮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있는 史書는 <檀奇古史>, <규원사화>, <桓檀古記>인데 이 세 史書들은 中國史書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많고 天文현상 기록에서도 진가를 인정받는 귀한 근거 사서이며 우리 선배들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현재까지 보존하여온 황금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歷史를 전공한 학위를 가진 學者들이 귀한 세 史書를 가짜라고 낙인을 찍은 것이다. 이것도 國內에 있는 많은 學者들이 토의하여 肯定的인 면과 否定的인 것을 가져서 眞假를 평가하지 않고 그 많은 내용가운데 일부분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史書 全體를 가짜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우리 歷史 歪曲의 主役인 日本의 書紙에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어떤 면에서는 매국적인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가. 史書의 소개
먼저 세 史書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① <揆園史話>는 李朝 숙종(肅宗) 때 (1675年)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했으며 이는 주로 <朝代記>(<조대기>는 渤海 멸망시 그 유민들이 高麗에 가지고 들어온 史書)를 引用한 史書로서 여기에는 조판기(肇判記)라 하여 桓因, 桓雄에 관한 天界와 地界를 연결하는 內容과 태시기(太始記)라 하여 檀君朝鮮 이전의 나라인 구리(九黎)의 치우천자(치尤天子)와 中國의 先祖인 黃帝(헌원:軒轅)와의 戰爭에 관한 기록이 있고 檀君記에는 1代부터 47代까지의 역대 檀君의 치적과 통치, 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檀君朝鮮 1195年의 기록이 있다.
② <檀奇古史>는 渤海시조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大野渤이 13年간에 걸쳐(707~719年) 편찬한 史書로서 <三國遺事>보다 약 560年 전의 책이다. 그러나 현재 나와 있는 <檀奇古史><는 1959年의 復刊本이다. 여기에는 檀君朝鮮의 47명의 歷代 王과 奇子朝鮮의 42名의 王의 치적을 중심으로 각종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③ <桓檀古記>는 1911年에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이 <三聖記> <檀君世紀>, <北夫餘記>, <太白逸史> 등을 합본하여 단일권으로 만든 史書이다. 여기에 포함된 <三聖記>는 上,下편으로 되어 上篇은 高麗中葉에 안함로(安含老)가 저술하고 下篇은 역시 고려 때 원동중(元童仲)이 지은 사서이며 <檀君世紀>는 고려 때 이암(李巖)이 저술하였으며 단군조선 47명의 역대 王의 치적과 2096년의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다. 또한 <北夫餘記>는 上,下篇과 가섭원 부여기(迦葉原夫餘紀)로 되어 있으며 범장(范樟)이 고려말에 찬하였다. <太白逸史>는 李朝 때 이맥(李陌)이 지은 사서로서 여기에는 三神五帝本記, 桓團本紀, 神市本紀, 三韓管境本紀, 蘇塗經典, 高句麗, 大震國, 高麗 등에 대한 광범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세 史書는 渤海, 高麗, 李朝 때 저술한 여러 책을 묶어서 筆寫로 보존해온 아주 귀한 자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 <揆園史話> <檀奇古史> <桓檀古記>가 僞書라는 이유 위에서 설명한 세 史書는 모두 허무맹랑한 가짜라고 하는 敎授의 論文의 要旨를 소개하겠다. 아마 이 論文은 學位를 가진 現職敎授들의 뜻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되어 비중있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 慶南大學校 史學科의 趙某敎授가 日本의 한 雜誌에 내놓은 ‘韓國에 있어서 古代史 論爭과 <揆園史話> <檀奇古史> <桓檀古記>’ 題下의 論文은 읽기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질 程度로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 內容을 부분적으로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1) 古朝鮮(檀君朝鮮)의 成立時期는 紀元前 10世紀경이라고 主張하므로서 現在의 歷史보다도 1300年을 빼버렸다.
(2) 古朝鮮의 初期 支配區域은 그렇게 넓지 않고 西洋의 古代都市國家나 中國 古代의 邑制國家와 같은 形態의 國家로 出發했다고 하여 현 滿洲와 韓半島는 勿論이고 中國 大陸도 包含된 넓은 彊域이었다는 우리 敎科書의 內容까지도 否定하고 있다.
(3) <揆園史話>는 다음과 같은 理由로 僞書라는 것이다.
첫째, <檀君記>에는 1823年에 韓鎭藉가 쓴 <海東繹史>의 地理考를 參考한 것으로 보아 1675年에 著述했다고 하는 <揆園史話>는 가짜이다. 둘째, 著者가 參考했다고 하는 李茗의 <辰域遺記>로부터 直接 引用한 高麗時代의 八聖中農業을 관장한 神을 甑城嶽神人, 風雨를 담당한 神은 월성악천선이라고 했는데 실은 前者는 목멱신(木覓神) 后者는 平壤神이므로 <揆園史話>의 著者가 조작한 책이다. 셋째, ‘文化’라는 單語를 Kultur, Culture의 意味로 使用한 것은 19세기에 일본에서 시작했고, 韓國에서는 20세기 초였으므로 <揆園史話>는 1900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책이다. 넷째, <揆園史話>는 1928년에 나온 <大東史綱>에 最初로 인용되었으므로 그 時期에 쓰여진 책이다. <揆園史話>는 檀君敎側에서 謄寫販賣했을 것으로 推定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揆園史話>를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에 옮겨 실은 徐熙乾氏는 다음과 같은 編著后記를 남겼다.
<揆園史話>는 3백여년 전 北崖가 저술한 ‘단군조선사’이다. 慕華思想에 젖어 있던 당시를 생각하면 함부로 내놓기 어려운 禁書였을 것이다. 이 <揆園史話>는 일제 때 양주동 선생이 비장하여 일본의 탈취를 모면했다. 그후 손진태 선생이 1940년 비밀리에 筆寫하여 보관했다가 祖國光復 後 기증한 것을 現在 國立中央圖書館이 귀중사료로 分類 보관하고 있다. 번역본은 故 신학균 본과 고동영 본이 있다. 필사본에는 잘못 적은 탓인지 오자와 탈자가 눈에 띤다. 이들 번역본을 참고하며 사단법인 儒道會의 홍찬유 선생의 도움을 받아 初譯한 <揆園史話>를 우선 싣는다. 필사본 원문에는 단군조선의 歷年이 1195년으로 나오나 歷代 임금의 재위기간을 합치면 1205년이 되므로 참고로 밝혀 둔다고 적고 있다. 또 <揆園史話>에 나와 있는 ‘八聖’은 중 묘청의 말을 듣고 官中에 팔성당을 세웠는데 청평은 八聖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적었다.
첫째, 나라를 지키는 백두산, 태백선인 곧 환웅천왕 둘째, 용위악(龍圍嶽) 六通尊者로 人間의 화목을 맡은 神 셋째, 월성악(月城嶽) 天仙, 風雨를 맡은 神 넷째, 고구려이 平壤仙人, 광명을 맡은 神 다섯째, 고구려의 목멱선인(木覓仙人), 인간의 수명을 맡은 神 여섯째, 송악(松嶽) 震主로 國都를 지키고 外敵을 쫓는 치우씨(蚩尤氏)의 神 일곱째, 중성악신인, 곡식과 초목(草木)을 다스리는 고시씨(高矢氏)의 神 여덟째, 두악천녀(頭嶽天女), 선악을 분별하는 신시씨(神市氏)의 皇后 즉 桓儉의 母 趙某 敎授가 指摘한 내용의 진가(眞價)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저자의 말처럼, 史書는 동일한 事件도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고, 또 기록자의 실수로 인해서 오자가 생길 수 있다. 다만 대체적인 내용이 맞으면 맞는 사서가 아니겠는가 몇군데의 오류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사서 전체를 부인한다는 것은 현명한 소치가 아닐 것이다.
(4) <檀奇古史>는 다음 내용으로 보아 가짜라고 조모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첫째, 前 檀帝 朝鮮時代에 명왕성을 관찰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명왕성은 1930년에 발견되었으므로 729년에 저술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檀奇古史>에는 명왕성이라는 말은 없고, ‘오성취루’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명왕성이 왜 여기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둘째, 본문과 주석에 이관구의 의견이 많은데 이관구는 檀族統一黨總裁와 사학연구협회회장을 역임한 사실로 보아 <단기고사>는 1945년 이후에 이관구가 쓴 위서라고 말하고 있다. (본서는 발해 태조 대조영의 弟 大野勃이 撰하여 (727년) 처음에는 渤海文字였으나 황조복이 한문으로 옮겼다(825년) 그뒤 이조말(1907년, 대한제국 광무 11년)에 당시 학부에서 출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간행하지 못했고, 그후 신채호, 이관구가 중국에서 출간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했다. 해방 후(1949년) 해암 김두화와 이관구 씨가 국, 한문으로 펴냈다. 이 사서가 전해 내려오다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고동영씨가 1986년에 새로 펴낸 것이다. 사서가 옮겨질 때마다 그 시대의 상황과 지명의 변경, 발행인의 시각의 차이 등으로 부분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사학자가 이런 내용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
(5)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위서일 것이라고 조모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첫째, ‘長春’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청나라(1796~1820년) 이후에 사용되었으므로 <桓檀古記> 모두가 1796년 이후에 나온 위서일 것이다. 둘째, <朝代記>로부터 인용된 부분에 ‘남녀평등’ ‘부권’ 등의 근대적 용어가 나오므로 근대에 저술된 책이다. 셋째, <태백일사>에 인용된 <조대기>에 연개소문의 친부와 조부의 이름이 태조와 ‘者遊’로 나오는데 이 이름은 1923년에 알게 된 것이므로 이 책도 1923년 이후에 저술된 책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규원사화> <단기고사> <한단고기>는 단군신앙과 관련된 사화에 불과하므로 역사연구의 史料로 이용할 수 없다고 조모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서들의 기록연대가 다르기 때문에 위서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데, 否定的인 측면만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내용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부분적이지만 설명되었고, 또 앞으로 전개될 高句麗, 新羅, 百濟까지 이르는 여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해, 전개되어 그 귀한 가치를 인정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4. 中國의 史書 中國의 史書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나 <二十五史>라는 큰 묶음으로 완전히 정리되어 정확한 역사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는 <二十五史> 중에서 古代史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1997.08] 역사 책(史書) 소개
military
1997년 08월 27일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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