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박헌영과 남로당 조직
해방 후 박헌영과 남로당 조직
지일수
이로 인하여 남로당의 뿌리는 소멸되고 말았다.
지도하는 사람이 본인의 권욕에 사로잡혀
시대 판단을 잘 하지 못했을 때,
그를 따르는 선량한 국민들의 희생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게 된 것이다.
오늘의 역사 속에 박헌영과 같은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유민주주의 선봉자가 되었다면
그 당시 대한민국의 혼란시기에 큰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항일투쟁에서 몇번의 옥고를 치른 경험자로서
왜 자유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공산주의를 선택하여
많은 양같은 국민을 희생시켰을까. ?
한이 맺힐 뿐이다.
박헌영은 1900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서 출생 본관은 영해(寧海)이며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현주(朴鉉柱)와 소실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문을 배우다 12세 되던 해인 1912년 예산군 대흥면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고 그해 경성고등 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조선중앙 기독교 청년회(YMCA) 영어반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경성고등을 졸업한 뒤 계속 영어공부를 하는 한편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미국 유학의 꿈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20년 9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는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도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회 부설강습소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임원건(林元楗) 등과 알게 되었다. 당시 임원건은 김단야(金丹冶), 최창식(崔昌植) 등과 함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단하였다.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프랑스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팜플렛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고려공산당 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1년에는 허정숙(許貞淑)의 소개로 뒤에 국내에서 결혼하게 되는 두 살 아래의 주세죽(朱世竹)씨를 만나 열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1921년 늦가을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극동 인민대표자 회의에 참석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가서 다음해 1월 고려공산 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2년 4월에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국내 공산당 조직을 하기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조선공산당 창설
1924년 1월 만기 출옥한 직후 그해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김찬(金燦) 신철(辛鐵) 등과 청주, 대구 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청년의 사회적 지휘 식민지 청년운동 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신흥청년’ 기관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허헌(許憲)이 사장으로 있던 좥동아일보좦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같은 시기에 국내 청년단체의 통일조직인 조선청년 총동맹이 창립되자 한신교(韓愼敎), 주종건(朱鍾建), 최순탁(崔順鐸), 강제모(姜齊模) 등과 함께 중앙검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9월에는 홍증식(洪增植)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사회부에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0월 15일 신일용(辛日鎔)의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례’라는 사실이 문제되어 조선일보 제3차 정간사건으로 임원근, 김단야와 함께 해직되었다.
1925년에는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한 핵심분파로 박헌영이 속해 있던 화요계가 중심이 되어 동년 4월 20일에 전 조선 기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여 일본 경찰의 관심을 흩어놓고 4월 17일 貪渦善,金若水, 金在鳳, 尹德炳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마침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다.
1925년 4월 18일에는 고려공산당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조직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그해 11월 30일 처인 주세죽과 함께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 복역하게 된다. 공판 도중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다음 해인 1928년 11월 국내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29년 6월에는 모스크바로 옮겨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1932년 1월 상해로 가서 김단야와 접선하여 김형선(金炯善)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커뮤니티"라는 기관지를 제작하여 국내에 배부하다가 1933년 7월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잡혀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되어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1939년 만기 출소하여 김삼용(金三龍), 정태식(鄭泰植) 등과 함께 세칭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데 지도 역할을 하였으나 1942년 12월 일본 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도피하여 김성삼(金成三)이란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취직하여 몸을 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8월 19일 서울로 올라와 광복 다음날 결성된 장안파 공산당에 대항하여 8월 20일 김행선,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였다. 1945년 9월 3일 장안파와 재건파가 연석회의를 가지고 이를 통합한 조선공산당의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이 당시 박헌영은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테제를 발표하여 당시의 혁명 단계를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규정하여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및 양심 있는 지주와 자본가와도 연합하여 혁명 전선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모험주의적 노선에 편양되어 연합전선과는 거리를 보이게 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촉성 중앙협의회를 창설하자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으나 11월 16일 친일파를 우선적으로 숙청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선 건국 후 친일파 숙청을 내세운 독립촉성 중앙협의회에서 탈퇴하여 이승만과의 연합이 좌절되었다.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국면이 전개되면서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을 때 조선공산당이 찬탁으로 노선을 결정하면서 1946년 1월 8일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에서 소련만의 신탁통치를 찬성하여 조선은 소련의 연방국으로 편입될 것을 주장했다는 시비로 이의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물의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15일 좌익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呂運亨), 허헌, 김원봉, 백남운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
동년 7월 12일 이른바 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을 계기로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국면이 전개되면서 9월 6일에는 미 군정이 박헌영 등 공산당 책임간부에 대한 검거를 감행하려 하자 하루 전인 9월 5일 관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위장하여 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그뒤 1946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 신민당이 합쳐 남조선 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계속 북한에 머물면서 이른바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남로당계 숙청 감행
1948년에는 남한에서 단독선거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자 지하선거를 실시하여 8월 29일에는 해주에서 남한출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으나 세력 기반이 남한에 있는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1950년 1월에는 남로당의 ‘한국화 남로당’, 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 건’ 등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기도 한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10월에는 인민 군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여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6·25 발발 원인에 관한 북한의 남침설 중의 한 갈래로 박헌영 자신의 지지기반인 남한을 충동시켜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3년에 김일성에 의하여 남로당계 숙청이 감행되면서 동년 8월 3일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15일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이로 인하여 남로당 뿌리는 소멸되고 말았다.
지도하는 사람이 본인의 권욕에 사로잡혀 시대의 판단을 잘 하지 못하였을시 그를 따르는 선량한 국민희생이 크다는 것을 알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역사 속에 박헌영같은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유민주주의 선봉자가 되었다면 그 당시 남한 혼란시기에 큰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항일투쟁에서 몇번의 옥고를 치른 경험자로서 왜 자유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공산주의를 선택하여 많은 양같은 국민을 희생시켰을까. 한이 맺힐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연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