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일에 목초를 그리며
이름 : 김진욱 번호 : 18
게시일 : 2002/05/20 (월) AM 09:30:55 (수정 2002/05/20 (월) PM 00:10:13) 조회 : 61
산행길에 지쳐 절방에 들어가 잠깐 눕는다는 것이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한잠 자고 일어났
더니 옆에 스님이 와 있었다. 스님은 부시시 일어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나도
일어나 앉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쳐다 보다가 또 눈을 돌
리고 또 그냥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땅거미가 질 때서야 그는 나에게 '나, 목초요'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그 늙은 중으로부터 '목초'라는 말을 듣고 괜히 머리속에 '파초'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나는 파초요'라고 말을 했다. 그게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와 한 3개월 정도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가 떠나고 또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
가 한 말과 행동들이 나에게 새롭기만 하다. 그때는 그가 한 말들을 그저 가볍게 지나쳤는
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의 말들이 우리시대를 통찰하는 예언이었다.
나는 그때 세상 모든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느껴지던 때라, 물론 내 이름조차도 그리해서 그
저 머리속에서 떠오른 '파초'라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그에게 말했는데 그후로 그는 나를 부
를 때 '어이 파초' 혹은 '파초씨'하고 '파초'라는 이름을 즐겨 쓰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파초'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깨뜨릴 '破', 그슬릴 '焦' '破焦'가 나에게 어울리
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3개월을 지내다가 다시 속세로 돌아와 몇 년이 흐른 뒤, 나는 어느날 동해
로 가는 버스에서 그가 입적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신문에 적힌 그의 경력
을 보니 그는 서울의대를 나온 의사였다. 도대체 그가 의대를 나와 왜 중이 되었던 것일까.
같이 자고, 먹고, 마시고 3개월을 같이 지냈지만, 나는 그가 의사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또
한 내가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석탄일을 맞아 목초스님이 참으로 그립다. "어이, 여보"하는 말이 귀에 들리는 듯 하다. 그를 만나 남은 것이 하나 있다면 파초(破焦)라는 이름이다. 그 말고 나를 파초로 부른 사람은 없다. 깨뜨릴 '破', 그슬릴 '焦' '破焦' 광대한 이 우주에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데, 뭐 나같은 미물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애가 달아, 마음을 그슬리는가.
그래도 가끔 세상일이 꼬여져 돌아가면 그가 한말을 상기하며 그가 보는 세상을 여기에 매달아 놓는 일도 나쁜 일은 아니리라.
석탄일에 목초를 그리며
military
2002년 05월 20일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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