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비 토벌작전에서 순직한
숭고한 영혼들의
명복을 빌며
이곳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저는 이곳에서 두번째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젯밤 내린 첫눈을 시작으로 이 계절은 우리에게 무겁고 긴 침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받은 상처 역시 무언가에 의해 덮어지고 잊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는 이곳 현리에서 자연의 순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능력
밖의 상처를 얻었습니다.
1996년 11월 5일
밤과 낮과 또다른 아침이 구별되지 않는 시간들……
두달을 경과해 펼쳐지는 대간첩작전의 긴박함이 아침부터 저를 TV 속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곳의 심상치 않은 공기와는 다르게 TV 속의 화면은 밝고 화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오전 11시경,
TV 화면안에 삽입된 짧은 속보에 저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망자: 육군 기무 부대장 故 오영안 대령 이분이 첫번째 공비들의 총알에 순직하신
바로 저희 부대장님이었습니다. 비보는 계속 되었습니다. 특공연대 대위(진) 서형원
1명 사망, 상병 1명 사망, 그리고 15명의 수많은 부상자들……
군인 가족으로서 참기 어려운 오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모두를
대신한 죽음같이 느껴졌고 슬픔에 찬 사모님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의 강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1996년 11월 6일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과 부대원들이 서울 수도 통합병원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믿겨지지 않는 다섯시간을 죄스러움과 혼돈속에서 흔들려야 했습니다. 군인 가족이라면
여자라면 아이를 가진 엄마라면 다 이해하시겠지만 남은 사모님과 가족분들의 슬픔을
대하기 고통스러웠습니다.
한개의 분향소 내에는 돌아가신 세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짙은 향내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저쪽에 저희 부대장 사모님의 조그만 어깨를 뵈올 수 있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라는 말이 있듯 부대장님은 사진 속에 계셨고 그 사진 앞에는 사모님이 계셨습니다.
한편에서는 나이 어린 형제가 영문도 모른 체 상주 노릇에 애를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병색이 완연하신 사망자의 아버님이 말을 잊고 계셨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군인 가족으로서 두번째 강을 넘었습니다. 군인 가족은 남편의
죽음이 죽도록 슬퍼도 그것을 조국의 영광으로 돌려야 함을, 인내해야 함을……
사모님은 그것을 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늘 내 남편이라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아집에서 괜히 억울해하고 성에 차지 않아 팔닥팔닥 거리던 삶의 기억들이 무거운
추를 달은 것 마냥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긴 시간이었습니다. 염을 하기 위해 가족들이 차례로 불려 나가고 다시 차례로
의식을 잃은 채 실려 나오고 한방의 진정제에 의지해 다시 상주의 자리에 서고……
1996년 11월 7일
영결식과 장례식은 찬 바람이 몰아치는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준장 故 오영안
소령 故 서형원
병장 故 강민성
가시는 그분들을 위해 노란 국화꽃이 사진앞에 쌓이고 그러나 꽃 한송이 쥐지
못한 채 꽃내음 한번 맡아 보시지 못한 채 그분들은 흙속에 묻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내가 처음 밟는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가신 분들 또 남아계신 분들의
환영속에서 난 내앞에 펼쳐진 수많은 강들을 보았습니다. 인간으로서 군인의 아내로서
저는 좀더 겸손해지고 좀더 진지해져야 함을 배웠습니다.
현리의 눈은 아름답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립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그날을 누군가 이런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비록 부대장님의 죽음과 가족분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지만 군인으로서
군복을 입으시고 지휘하다 순직하신 것은 슬픔이라기 보다는 명예롭게 기억해야 한다'
고
여러분들도 이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삼가 준장 故 오영안
소령 故 서형원
병장 故 강민성님의 명복을 빕니다.
1996년 11월 30일
현리에서 군인가족 기선 엄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