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권쾌복 회장을 찾아서


취재·정리: 박정아 차장


장마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여의도에 위치한 광복회관에 13대로 취임된 권쾌복 회장(75세)을 찾아 그로부터 광복 51돌을 맞아 민족사에 새 지평을 열어 가고 있는 광복회의 이모저모를 알아 보았다.


광복회는 일제가 국권 침탈을 획책한 1895년 을미의학(乙美義學)으로부터 1945년 8월 14일 광복전야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공자와 그 유족이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며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됐다.


근세인 이조말엽 일제에 대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래 광복을 맞기까지 민족제단 위에 희생한 유명무명의 烈士.義士.志士들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국가적 보훈사업은 광복직후의 사회적 혼란과 6.25동란 등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2년도에 3.1절을 맞아 비로소 정부가 독립유공자 2백4명에게 건국훈장(대한민국장.대통령장.국민장)을 추서 및 서훈하고 4월 16일에 독립유공자 등 특별원호법이 공포되면서 비롯되었다.


1964년 4월 원호처의 주선으로 서울 을지로 2가 동화빌딩에 광복구락부를 설치했다.


애국지사와 선열의 유족들은 광복구락부에서 자주 만나 친목을 도모해 나갔다. 이때에 독립동지회와 유족간부회가 있었는데 대표들이 수차 만나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고 단일 조직체 결성을 준비했다.


이듬해인 1965년 1월 31일 광복구락부에서 가칭 광복회 발기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위원장에 조시원(趙時元)선생을 선출했다.


그리고 1965년 2월 27일 애국얼의 총집결체인 광복회가 사단법인 형태로 창립됐다. 이날 을지로 2가 광복구락부에서 애국지사들과 그 유족 그리고 많은 유관기관 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광복회 창립총회에서는 3.1 독립운동시 활약한 33인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갑성(李甲成)선생을 초대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했으며, 부회장에는 조시원(趙時元).조형신(曺亨信).주옥향(朱鈺鄕)선생이 각각 선출됐다.


창립총회는 또 회장 1인, 부회장 3인, 이사 20인 이내, 감사 2인을 두고 회무집행을 위해 총무부.문화부.사업부 등을 두는 것을 골자로 한 정관개정안을 심의,통과시켰다.


이날 식장에는 임시정부에 관계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규갑(李奎甲)선생과 한국 광복군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이준식(李俊植).안춘생(安椿生)선생 그리고 대구에서 상경한 김우근(金宇根)선생과 임의택(林義澤)선생 등 애국지사와 그 유가족 등 50여명이 참석, 항일투쟁의 긍지를 지켜 조국통일에 기여할 것을 다짐했다.


권쾌복 회장은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라고 말하고 ‘어떤 고난과 장애가 가로막을 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고산준령을 오르는 등반자의 극기와 인내로써 통일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 헤쳐나가야 한다’고 했다.


권회장은 ‘이제 우리는 세계의 당당한 중심국가로 떠오르고 있지만 광복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다’고 밝히고 ‘남북의 민족성원 모두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일이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며, 통일의 큰 길을 열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또한, 역사는 청산과 계승을 통한 창조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단순히 식민잔재의 외형적인 청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의 의식속에 남아있는 그릇된 역사의 잔재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뜻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과거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아울러 요즘, 밑바닥에 떨어진 사회정의와 도덕과 윤리를 회복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순국선열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되새기는 범국민운동이 전개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권쾌복 회장은 경북 칠곡에서 출생하여 ’41년 대구사범 재학중 항일결사대 다혁당을 결성하여 활발히 움직이고 있던 중, 그해 일경에 체포되어 2년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43년 11월에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45년 8월 해방으로 출옥.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