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韓 軍備競爭의 比較 (Ⅱ)
신 영 진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79년을 기점으로 북한의 군사력은 한국군의 병력규모를 초과하고 있으며 1984년에 이르면 80만명 선에 도달하여 한국군보다 10만명 이상 압도하고 있다.
이같은 병력의 증가는 그 대부분이 지상군 병력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한 특수전 병력의 급속한 확장이다
第 3期 (1976-1984):
攻擊型 戰力體系 轉換段階
70년대 중반까지 대체적인 방어능력을 확보하고 부분적으로 공격능력의 강화를 시작했던 북한의 군사력은 70년대 후반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또 한번의 전반적인 전력증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의 전력증강이 70년대 중반까지의 전력증강과 구분되는 점은 7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군사력에는 방어능력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과 함께 공격적인 요소들에 대한 집중적인 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총병력 규모는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79년을 기점으로 한국군의 병력규모를 초과하고 있으며 1984년에 이르면 80만명 선에 도달하여 한국군보다 10만명 이상 압도하고 있다.
이같은 병력의 증가는 그 대부분이 지상군 병력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한 특수전 병력의 급속한 확장이다. 북한의 특수전 병력은 1966년 124군 부대의 창설 이후 1971년에는 3만 5천명으로 증가되었으며, 1980년에는 약 10만 명의 특수전 전담 특수병력을 확보하였다.20) 이같은 양상은 공군에서 다량 확보하고 있는 AN/2기와 해군에서 집중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소형 고속함정 등과 연계시켜 볼 때, 이 시기의 북한 군사력 증강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공격능력의 강화를 추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지상전력중 기갑전력의 경우 우선 전차의 보유대수는 아래 도표 10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75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 어느 시기보다 급속한 강화를 보이고 있다. 즉, 1975년에 1,130대에서 기간말인 1984년까지 2,825대로 증가하였다.21) APC에 있어서는 아래 도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70년대 이후 대략 750대 수준이던 것이 1982년 이후 1,140대 이상을 확보하고 있다. 이같은 기갑전력의 급속한 증강은 분명 상당한 공격능력의 강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지상화력에 있어서는 1976년을 고비로 박격포가 급속히 증가하여 1977년에는 9,000문으로 증가하였고 다시 '80-'81년사이에 11,000문으로 증가하여 1975년까지 2,500문 수준에서 무려 4배나 증가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북한 지상화력에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대공화력의 증가다. 즉, 대공포 역시 1976년을 고비로 2,500문 수준에서 1977년에 5,000문 그리고 기간 말에는 8,000문으로 증가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종 야포의 경우는 1978년까지 대략 3,000문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1981년에는 4,100문으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증가되고 있다.
요컨대, 이 시기의 북한 지상전력은 기갑과 화력, 그리고 특수전 병력의 급속한 강화로 한국에 대한 제한적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공격능력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양상은 해군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1976년 8척이던 잠수함은 1977년에 2척, 1978년에 5척이 증가되어 1978년에 15척으로 증가되었고 이어 꾸준히 증가되어 기간 말경에는 21척으로 증가되고 있다. 그리고 초계정의 경우 1975년 60척에서 1976년 105척으로, 그리고 1977년에는 115척으로 증가되었으며, 1981년에는 215척으로 증가되고 있다. 어뢰정 역시 1976년 이후 급속히 증가되어 1980년에는 225척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1975년에 비해 근 3배에 가까운 증가인 것이다.
기간중 북한의 공군력 변화를 살펴보면, 1975년에 580대 수준의 전투용 항공기가 1978년에는 655대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에는 565대로 감소하고 있다. 이는 MIG-15/17 등 구형 항공기의 도태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1980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80년과 1981년 2년사이에 140대 정도의 항공기가 증가하였고, 1982부터 1984년간에 다시 40대 정도의 증가가 이루어져 기간말까지 북한은 약 750대 정도의 전투용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기간중 북한의 전투기 변화는 이전 단계의 정체기를 벗어나 제한된 질적 개선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대남 숫적우세의 유지에 머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1960년대 중반까지의 현격한 대남 우세에 비교해 볼 때는 현상유지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간중 북한 공군력의 변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측면은 수송능력의 급속한 증가이다. AN-2기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들 수송기의 증강은 이 기간중 북한의 특수전 능력의 급속한 강화, 그리고 해상전력에 있어서 고속 공격함, 침투능력의 강화와 더불어 기간중 북한 군사력이 공격형 군사력으로의 전력체제 전환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第 4期 (1985-1993):
攻擊型 戰力體系 强化段階
1985년 이후 북한의 군사력은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또 한번의 집중적인 증강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의 증강은 양적 측면에서의 강화 뿐만 아니라 무기의 질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강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체계상으로 볼 때 통합된 對南 공격형 전력으로서의 분명한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
우선 병력 부문에서는 도표 #1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7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인 증강이 추구되어 1985년을 기점으로 북한의 총병력은 80 만명을 넘어섰으며, 1992년에 100만명을 초과하고 있다.
북한은 1992년 4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군 조직도 개편하였다. 지상군은 인민무력부 예하에 2개 포병군단과 4개 기계화군단, 전차 1개 군단을 포함하여 18개 군단, 53개 사단, 99개 여단으로 증편되었으며, 전력의 배치 또한 전반적으로 비무장지대(DMZ) 부근으로 전진 배치됨으로써 이 시기의 북한 군사력이 공격형 군사력으로서 그 태세를 본격화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80년대 중반 이후 1개 기갑사단과 1개 포병군단을 비무장지대 50KM이내로 전진배치함으로써 기습 경고시간을 단축시켰다.23) 이같은 공격형 배치의 추진과 함께 1985년 이후 또 한번의 전반적인 물량적 팽창은 결국 북한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그간 조성되어온 군사력을 본격적인 공격형 군사력으로서 그 체계를 강화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지상 전력부문을 살펴보면 도표 #1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82년 이후 2,825대 수준을 유지하던 전차가 1984년을 기점으로 3,400대 수준으로 증강되었고 1993년에는 3,800대로 증가되고 있다. 한편 APC는 1981년 이후 1,100대 수준에서 1991년 이후에는 2,500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화력에 있어서는 증강의 한계에 이른 박격포와 대공포는 전단계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야포에 있어서는 방사포를 포함해서 1984년의 6,300문 수준에서 1989년에 9,000문, 1993년에는 10,300문으로 계속 증강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북한 지상군의 능력중 기계화부대의 증강은 기습남침 공격시 전격전 수행을 위한 공세전력을 확충한 것으로 평가되며, 특수부대의 증강은 유사시 전.후방지역에 대량침투하여 배합전으로 남한 全域을 동시에 전장화(戰場化) 하기 위한 것이며, 특히,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땅굴을 굴착한 저의는 개전 초기 경보병 및 특수부대를 대규모로 은밀히 침투시킨 가운데 전면적인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한국군의 전방 주력부대를 조기에 무력화하면서 후방에 침투한 특수전부대와 연결작전을 실시하여 전 국토를 동시 전장화하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해군력에 있어서는 전단계인 1984년의 530척에 비해 1993년에 740척 으로 계속 빠른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1993년도 북한 해군의 능력을 보면, 동해에 430여 척, 서해에 310여 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함정은 경비함, 유도탄정, 어뢰정, 화력지원정 등 전투함 430여 척, 상륙함, 공기부양정 등 지원함 310여 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에는 W급과 R급의 잠수함 25척이 포함되어 있다.
공군력의 경우 이 단계는 MIG-21, 23, 29기를 도입하는 등 또 한번의 전략적 증강을 나타내고 있다. 즉, 전체 전투기의 숫자는 84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증강되어 1984년 750기에서 1993년에 전술기 850기, 지원기 480기, 헬기 290기 등 1,600기의 각종 항공기가 증가하였다.
북한은 1950년 한국전쟁시 유엔군으로부터 대규모의 공중공격을 받은 경험을 토대로 휴전 이후 오늘까지 12,000여 문의 고사포와 300여 기의 지대공 미사일을 보유하고 조기경보 및 요격을 위한 레이다 장비를 증강 운영함으로써 강력한 방공망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1980년대 중반에는 구 소련으부터 저고도 항공기에 대비한 단거리 방공무기 SA-3, 그리고 1987년에는 고고도 및 장거리 목표 요격기인 SA-5/7과 전방향 공격이 가능한 SA-16를 도입 배치함으로써 한반도 중부지역을 비행하는 군용기는 물론 민간항공기에도 위협요인으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북한은 1990년대초에 T-62 전차를 개량한 천마호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야전포병의 52%를 자주화하였으며, 최근에는 1976년부터 구소련으로부터 SCUD-B 미사일을 도입, 자체 모방 개발하여 (사정거리 500KM) 이를 이란 등 중동지역에 수출하여 세계 미사일 수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즉, 북한은 전략적 차원에서 새로운 강화의 단계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시기의 북한 공군력 변화중 특기할 만한 점은 헬기의 급증이다. 즉, 1984년까지 40-60대를 유지하던 헬기는 1985년에 170대로 급격히 증가되었으며, 다시 1989년에 280대로 급증하였다. 특히 북한이 1985년 한국이 보유량을 증가 시키고 있던 휴즈사의 500MD 헬기 85대를 밀수입하였던 사실은 한국의 헬기와 같은 종류인 이들 헬기를 이용하여 한국에 대한 위장침투를 기도하려는 목적 이외의 별다른 목적을 가정할 수가 없으며, 전체적인 전력 구조가 공격형으로의 전환을 판별케하는 또 하나의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AN-2기를 주종으로 하는 수송기는 270기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군사력 증강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1985년 이후의 기간은 어찌보면 그 이전 단계와 동질적인 증강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증강은 제반 무기의 고도정밀화가 보다 집약적으로 진척되었으며, 군사력의 배치나 MIG-23/29기의 도입 등을 감안할 때, 이 시기 동안 북한의 군사력은 실전적 전력체계로 구성.강화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 단계와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군사력 증강은 공격형 군사체제의 강화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第3章 韓國의 軍事力 增强過程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군은 소련군의 진주보다 1개월이 늦은 1945년 9월 8일 남한지역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미군의 진주가 지연되자 남한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계속됨에 따라 좌.우익의 각종 정당 및 사회단체가 난립하였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함에 있어서도 충분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채 無政見한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정국의 혼미와 경제의 파탄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의 무질서가 계속되었다. 더욱이, 미 군정당국은 자유주의 이상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공산주의를 포함한 각종 단체의 정치활동을 합법적으로 허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한에는 한때 200여개의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사설 군사단체가 난립하였다.
이들 중 공산계열 단체들은 남한의 적화(赤化)를 꾀하면서 공산당의 도량(跳粱)과 파괴행동을 점차 극렬화시켰으며, 결국 미 군정당국은 공산당의 활동을 불법화하기 위한 조치와 아울러 공산당 간부를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남한에 있던 공산당계열 단체는 지하로 잠적하여 비합법적인 투쟁을 계속하였다.
미 군정당국은 이의 대응책으로 1945년 10월 국립경찰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경찰력만으로 당시의 안녕(安寧) 질서를 회복하기는 어려웠으며, 미군도 북위 38도선의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사회질서의 조속한 회복과 장차 한국의 국토방위를 전담할 군사력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은 마침 한반도에 대한 통치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가 추진중에 있었으므로, 남한의 군사력 조직은 동 위원회의 결과에 따라 편성하기로 하고, 우선 2만 5천명 규모의 경찰 예비대인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가, 정부 수립후 국군으로 편성하였다.
다행히 정부수립전 국방경비대라도 창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1950년 한국전쟁기간중 본격적인 국군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미 군정기간중 국방경비대도 창설되어있지 않고 정부수립후 국군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면 국군은 전쟁도 치루지 못하고 현재 존재하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방경비대를 모체로하여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군으로 편성된 우리 군은 이 전쟁을 통해서 군사력으로서 본격적인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950년 한국전쟁 직전 한국의 군사력은 약 10만 명 정도의 병력에 개인화기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으나27) 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군은 60만 명에서 65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보유하는 군대로 변화하였으며, 육.해.공군의 각 부문에 걸쳐 낮은 수준이나마 한 국가의 군사력으로서 기본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군사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한국군은 휴전후 북한의 새로운 위협에 대비한 안보태세를 강화하기 위하여,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으며, 그 후 1954년 11월 17일 에는 한.미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여 한국군을 현대화 하기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지원으로 점차 균형된 전력구조를 갖추어가기 시작하였으나, 1965년 이전까지는 별다른 뚜렷한 전력상의 강화를 나타내지 못한채 기본적인 체제정비와 현상유지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1965년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계기로 제공된 미국의 군사지원과 1960년대 말 북한의 격화된 대남. 대미군사도발을 계기로 또 한번의 미국의 군사지원은 한국군으로서는 전후 최초의 실질적인 군사력 증강의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1970년대 주한 미군의 일부 철수가 실질적인 문제로 제기되면서 한국군은 미국의 원조와 자체의 재원을 본격적인 군사력 증강에 계획적으로 투입, 군사력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따라서 1970년대 이후 한국군의 전력은 어느 특정한 단계를 구분할 수 없는 지속적인 강화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군사력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F-16 등 고도정밀기술 장비와 각종 유도무기, 소형 고속정, 그리고 전차, 박격포, 야포 등 군사력의 각부분에 걸쳐 보다 빠른 속도로, 또 보다 고도화된 무기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음에 따라 그 증강의 속도 및 방향, 그리고 조성된 군사력의 특성 등을 고려할 때 1970년대의 군사력 증강양상과 구분되는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章에서는 다음과 같이 4개 시기로 나누어 한국의 군사력 증강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① 第1期(1953.7-1964) : 戰後 基本軍事體制 整備 및 現狀維持 段階
② 第2期(1965-1970) : 防禦能力의 部分的 補完
段階
③ 第3期(1971-1981) : 戰力構造의 體系化 段階
④ 第4期(1982 1993) : 自主的 防禦戰力 確保期
第1期(1953.7-1964):
戰後 基本軍事體制 整備 및 現狀維持 段階
휴전 후 북한은 휴전협정상의 군비증강 금지조항(제13조 D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반하여 계속 군비증강를 도모하게 되자, 유엔군측에서 여러번 경고하였으나 북한은 이 규정을 계속 위반 하였고, 1957년 6월에 이르러 유엔군측은 이 조항의 준수의무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군은 필요한 장비의 도입이 가능하게 되어 보다 순조로운 군비확충을 실현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있어서 한국의 군사력은 대규모 병력 유지와 그에 비해 극히 낮은 수준의 무장 상태의 유지로 특징 지워진다.
우선 한국군의 총병력 규모를 살펴보면 전쟁중 급격히 증강된 60-63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즉, 전쟁전 약 10만 명이었던 한국군의 총병력은 전쟁중 급증하여 휴전 당시 60만 명에 이르고 있다. 그 후 일부 주한 미군 사단의 철수시 이들의 장비를 이양받아 2개 전투사단과 10개 예비사단을 창설하는 등 한국군의 군비증강이 진행되고 있던 중, 이러한 군비증강이 한.미 양국의 재정에 과중한 부담이 초래하게 되어 1958년에 이르서는 한국군의 병력 규모를 720,000명 수준에서 630,000명 수준으로 감축하게 되었다.28) 그러나 같은 시기중 북한의 총병력이 40만 명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은 전후 지속적으로 북한의 1.5배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0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은 그 운영 및 유지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전투장비는 물론 심지어는 피복 일부, 탄띠, 기타 장구류까지 미국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29) 우선 지상화력의 보유 현황을 살펴보면 도표 #15와 같다.
지상화력에 있어서 이 시기의 한국군은 병력의 규모에 비해 충분한 화력지원을 감당하기에 부족한 수준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의 한국군은 북한군보다 1.5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지상화력은 북한이 각종 야포 약 3,000문, 한국은 각종 화포 약 1,560문을 보유하고 있음을 볼 때, 전후 약 10년간 한국의 지상화력은 북한에 비해 현격한 숫적 열세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차와 장갑차의 보유현황을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한국 해군은 휴전 당시 전투용 함정 30척을 보유하였으나, 전후 그런대로 꾸준히 증강을 보이고 있다.
한국 해군은 도표 #17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55년에 LST 3척을 포함한 14척의 함정을 도입하였으며, 1956년도에는 호위 구축함 2척을 포함한 17척의 함정을 도입한 것을 비롯하여 기간중 총 63척의 함정을 도입하였다.30) 그 후 한국의 해군력은 노후장비의 교체 등으로 총 함정 보유량에 있어서 약간의 기복을 나타내고 있으나, 1964년까지 구축함 4척, 호위경비함 4척, 초계함 4척, 구잠함 7척, 상륙정 19척 등 전투용 함정만 총 67척에 54,000여 톤과 보조함 145척 4,500여 톤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기간중 한국 해군력 변화의 특징은 휴전 이후 부분적이지만 지속적인 보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과 함께, 북한이 소형함정 위주의 해군력을 구성해가고 있었던데 비해, 한국의 해군은 구축함, 초계함 등 대형함정 위주의 해군력을 구성해가고 있었던 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조성된 한국 해군의 전력구조는 특별히 공격형이라든가, 또는 방어형이라든가 하는 형태적 특성을 구분할 수 없는 분산적이며 비체계적인 산만한 형태로 유지 되고 있었다.
한편, 이시기에 있어서 한국 공군력 역시 총 항공기의 숫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 북한에 비해 현격한 열세를 유지한 채 부분적인 보강만을 지속하고 있었다. 한국 공군의 주요 항공기 보유현황은 다음 도표와 같다.
이상의 현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후 한국 공군의 항공기는 F-86계열의 전투기였다. F-86 전투기는 전투반경이 435KM이고 최대속도가 마하 0.9인 전폭기 또는 요격기용의 전투기다. 그러나 이미 북한이 1959년에 보유한 MIG-19는 전투반경이 645KM이고 최대속도가 마하 1.3인 요격기이다.
1960년 이후 한국에 공대공 미사일 (Sidewinder)를 장착한 F-86D가 이전된 것은 이같은 질적 열세를 부분적으로나마 만회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총 전투용 항공기의 수에 있어서도 이 시기 동안 북한이 600기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던데 비해, 한국은 200기에서 250기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후 한국의 공군은 북한에 비해 질적, 양적 측면에서 모두 현격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전후 1964년까지 한국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1.5배 이상의 대규모 병력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그 무장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떤 뚜렷한 전력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휴전 이후 1964년까지의 한국의 군사력증강 양태를 전체적으로 眺望할 때, 이 기간중 한국의 군사력은 부분적인 전력보강으로 현상유지에 머물고 있으며, 성격상 하나의 독자적인 군사력이라기 보다는 한.미 연합군의 일부로 존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