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위 노심초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아)
박정아
대한국인 안중근(安重根)의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애국지사다.
안의사는 조선왕조 말엽인 1879년 9월2일(음력 7월16일) 순흥(順興)을 본관으로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26대손으로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출생했다.
조부는 진해현감을 지낸 부호 안인수(安仁壽) 공(公)이었고, 부친은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태훈(泰勳)공(公) 이였으며, 모친은 백천(白川) 조(趙)씨로 안중근 의사는
3남1녀중 장남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개가 박혀있어 북두칠성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하여, 자(字)를 응칠(應七)이라 불렀다.
6살때인 1884년 부친이 김옥균, 박영효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을 포기하고 일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밑 청계동으로 은신한 후
의사는 이 산촌에서 성장했다.
안의사는 이곳 서당에서 9년간 한학을 수학했는데 그는 정적인 학문보다는 동적인
행동을 좋아했으며 특히, 말타기와 사격술이 뛰어나 일찌기 문무를 겸비한 십대소년으로
근동(近洞)에 명성을 떨쳤다.
1894년 안의사가 16세되던 갑오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게 되어, 갑오경장이란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으나,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 한국은 이들의 지배권 싸움으로 각축장이 되었고, 이때 지방군현에서는 동학을
빙자한 무리들이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이유로 관리들을 죽이고 약탈행위가
끊이지 않아 안의사는 부친과 함께 수백명의 장정들과 더불어 관군을 도와 이를 진압하기도
했다.
황해도에서 이러한 동학당 진압의 공이 큰 부친 안태훈이 이들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을
둘러싼 중앙관리의 모함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천주 교회당에 숨어 난을 피할수
있었는데, 이때 온가족이 성서의 진리를 깨달아, 전통적인 유교 생활에서 천주교로
개종을 했고 이 기에 안의사도 16세 나이로 김홍섭씨의 따님 아려(亞麗)양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게 되었다.
17세때는 프랑스인 비레햄 신부(洪錫九 神父)로 부터 영세를 받아(도마)라는 세례명을
얻었고 프랑스말과 서구문화의 신지식을 배웠다.
이후 10년간은 홍신부와 황해도 일대를 순례하면서 복음전파에 힘썼으며, 안의사는
한국의 자주독립발전을 위해서 우선 인재를 양성해야한다 하고, 홍신부와 서울의
천주교 최고책임자인 프랑스인 뮈델주교(閔大主敎)를 만나 한국에 대학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유럽의 천주교 수사회가 한국에 대학을 세우도록 도움을 요청했으나, 뮈델주교는
학문이 오히려 신앙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한국은 아직 대학교육이 시기상조라고
거절당하자, 안의사는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은 믿을 것이 못된다며, 불어공부마저
중단하기도 했다.
1904년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안의사는 한국과 만주의 분할권을 둘러싼 이 전쟁이
한국으로서는 양국 어느 편이 승리한다해도 결코 이로울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1894년에 있었던 청 .일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쟁도 한국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키고 동양평화를 이룩하기위한 것이라고 칙서(勅書)까지 발표했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를 바랬지만,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매국 5적을 앞세워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5)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항의 조정에서는 시종무관장 민영환과 참판을 지낸 홍만식등이 자결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피눈물나는 글을 썼고,
전국 각지에서는 이조약의 페기를 요구하는 군중 봉기가 일어났다.
이해 겨울 청계동에서 사색에 잠겨 은인자중하던 안의사는 을사조약을 개탄하고
어떻게든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부친과 상의, 한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중국
산동성 등지의 적당한 곳에, 반일운동의 기지를 만들고자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 도착한후 안의사는 우연히도 황해도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같이한 프랑스인
곽(郭)신부를 만나게되어 그의 조언으로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단 애국계몽운동을
하기로 했다.
그해 12월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항시 나라걱정을 하고 애태우시던 부친이 이미
별세한 것을 알고 장남으로서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다시 올리고, 유지를 받들어
국권이 회복될때까지 육영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06년 3월 그는 드디어 고향 청계동을 떠나, 항구도시인 진남포로 이주하여 일부
가산을 기울여 삼흥(士興, 民興, 國興) 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여
구국영재를 양성하는데 힘쓰는 한편, 안창호 이준등 저명한 애국지사들을 초정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는등 지방 애국계몽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천주교를 전교하던 독실한 신자 안의사가 교육을 통해 민족의 영재를 양성하는
구국교육가로 헌신하게 된것이다. 안의사는 원래 신앙인이며, 교육가이다. 그러나
이런 안의사를 의병이라는 무장투쟁으로 변신케한 것이 곧 일본의 통감정치였다.
일본은 1907년 7월(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한국의 초대통감인 (히또히로부미)는
광무(光武:高宗)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조약을 강요하며 군대를 해산하는가
하면, 산림과 광산 그리고 철도를 빼앗는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한 일 완전합병 계획을 은밀히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안의사는 마침내 결심한다.
교육으로는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하고,
국내에서의 투쟁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해외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안의사의
나이 29세였다.
안중근 의사는 북간도를 거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
국외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이범윤 김두성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한 대한국 의군창설에 성공한 안의사는 참모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 특파대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7월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고을에서 일군경과
세차례의 교전끝에 50여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회령으로 진격하여,
5,000여명의 일본 수비군들을 격퇴하는등 13일동안 30여차례 교전을 했는데, 의사는
이때 잡은 포로들을 (국제공법)과 인도주의를 들어 석방, 의병들중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이 작전은 정예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고군분투했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부하들도 흩어져 중과부적으로 참패,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장마속 산길을
헤맨끝에 한달반만에야 연해주 본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의병투쟁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그럴때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안의사는 다음과 같은 시로 격려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안의사는 결전과 승패를 거듭한 국내 진공작전후, 다시 심경을 가다듬고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등 러시아 영토의 연해주 일대와 중국땅 흑룡강 상류지방을 시찰하며,
강연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 규합에 힘을 쓰는 일을 계속했다. 이 무렵
그곳 한인 사회에 침투하고 있던 친일 단체인 일친회의 일당들에게 습격을 당하여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어 그곳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그곳 교포 사회에도 친일 세력이 침투해 있는 것을 보고 1909년 2월 7일 의사는
연추부근 카리 마을에서 믿을 수 있는 동지를 모아 단지동맹을 결성하였다.
점차 어려워져 가는 시국에서 자기의 굳건한 신념을 증명하는 11명의 동지와 손가락을
잘라, 국권회복을 위한 자신의 의지를 재천명한 것이다.
이는 동요되기 쉬운 그곳 사회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온 국민의 염원인 국가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헌신하는 중심인물이 있었야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11명의 동지 앞에서 의사는 무명지끝을 자르고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라고
썼으며 동지들도 이를 따랐다. 이때의 단지동맹동지는 안중근 자신을 비롯, 김기룡(29세),
강기순(39세), 정원주(29세), 박봉석(31세), 류치홍(39세), 조순응(24세), 황길병(24세),
백남규(26세), 김백춘(24세), 김천화(25세), 강계찬(26세) 등이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정부는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여, 한국을 합병한 뒤에는
중국령 만주를 침략할 계획으로 한국통감으로 있다가 돌아가 일본의 추밀원의장이
된 이또를 하얼빈으로 보내 당시 러시아 정부의 대장대신인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전체에
대한 정책을 협의한다는 구실로 북만주 시찰계획이 발표되었다.
이소식을 접하게 된 안의사는 그동안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자주독립권을 무자비하게
박탈한 이또가 오다니!
“이건 분명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겼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대동공보사주필 이강동지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
기회에 이또를 사살 만방에 알리면 일본의 침략정책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안의사는 이 계획을 이곳에 있던 독립투사 정재관, 김서무 등과 논의하고, 의병동지
우덕순을 대동 1909년 10월 21일 하얼빈을 향해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청 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문화 도시이기 때문에 안의사는
하얼빈으로 가면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류동하동지를 대동하고 이튿날 하얼빈에 도착
한 후엔 조도선 동지를 영입하여 의거장소가 두곳으로 나누어질 때를 대비했다.
그리고 그는 이날 저녁을 이곳 한인 사회에서 신망높던 김성백씨 집에서 묶게
되었다.
밤새 여러신문을 모아 이또의 도착시간과 환영절차등에 관한 정보를 모아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간 권총과 실탄을 점검하기도 했다.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인 거사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만일을 위해 안의사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와 러시아의 동청철도가 교행하는 흑룡강과
길림성의 경계에 있는 채가구역에서 이또가 열차를 갈아탈 순간도 거사의 기회라
생각하고 그곳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안의사는 세기적인 역사의 현장을 하얼빈
역두로 잡았다.
안의사가 하얼빈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경, 일단 역사안 찻집으로 들어가 동정을
살펴보니 러시아 군인들과 출영객이 역사 안팎으로 들어차 혼잡했다. 이윽고 오전
9시쯤 이또 일행이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에 멎었고, 마중나온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 후, 그와 일본 총 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또와 수행원이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때 의사는 이거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성공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찻집에서
나왔다.
이또가 의장대를 사열하고, 외국영사단 앞으로가 출영객들로 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고, 안의사는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또가 안의사와 10보 떨어진 지점에 접어들 찰라, 도열해 있는 군인들 사이로
이또를 겨냥 의사의 브로우닝식 권총이 불을 뿜었다. 3발이 이또의 가슴과 흉복부에
명중되어 무어라 몇마디 중얼거리면서 쓰러졌다.
수행의사 고야마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곧 절명하고 말았다.
안의사는 본시 이또를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한번 잘못하면, 천하대사가 낭패라고
생각, 만전을 기하여 일본인중에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들을 향하여 다시 3발을
더 쏘았다.
이또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총영사 가와가미(川上), 비서관 모리(森), 만철(滿鐵)이사
다나까(田中)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이때가 오전 9시30분 안의사는 저격직후 러시아 헌병들이 덥치자, 힘에 밀려 넘어지면서
권총을 떨어뜨렸던 의사는 곧장 일어나 코레아우라!(대한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됐다.
한국에 이어 만주를 삼키려던 일제하수인 이또 피살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전보는
실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였으며, 온 세계가 떠들썩했다.
동경 일일신문과 대한매일신보등의 호외가 나왔고 해외에 망명, 독립운동을 하던
우국지사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오히려 친일파들이 당황했다.
중국은 또한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 처럼 생각하며 기뻐했다.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이었던
원세개도 안의사의 의거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건 장부가 아니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만방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살이 없는 건데 죽어서 천년을
가오리다.
중국의 실자들은 당시 하얼빈의 의거 때문만에 안의사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썩어가는 중국이 일본, 영국, 프랑스등의 침략을 막을 길이 없어 막막할 때,
잠자고 있는 중국인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 한국의 민비명성황후를 살해한 죄요.
둘, 한국의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 을사보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 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요.
여섯, 철도 광산 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일곱, 일본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의 경제를 교란한 죄요.
여덟,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요.
아홉,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키고 식민지화한 죄요.
열 하나, 한국사를 말살하고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요.
열 둘,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열 셋,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
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 넷, 대륙침략으로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열 다섯, 일본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다.”
이것이 안의사가 대한국의군 참모총장 자격으로 이또를 처단한 동기, 이른바 이등의
죄악 15개 죄다.
안의사는 거사 당일 있은 러시아 검사 신문에서부터, 일본 검찰관의 신문과 이듬해
2월의 공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또의 죄상을 이렇게 설파했다.
첫 신문에서 위의 내용과 같은 안의사의 진술을 다 듣고난 미조부치 검찰관은
놀라면서 “이제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하겠다. 그대는 국사범이니까
절대로 사형받는 법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의사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 것 없고, 이 뜻을 속히 일본왕에게 아뢰어라. 그래서 속히 이또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쳐서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도록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로
말을 마치고 다시 지하실 감옥으로 돌아갔다.
하얼빈 총영사관 지하실 감방에서 1차 조사를 받은 후 안의사는 11월 3일 우덕순
조도선 류동하등과 같이, 여순형무소로 이송 수감됐다. 여순은 행정 구역상으로 요령성
대련시 여순구로 중국 북방최대의 항구도시인 대련시의 6구 가운데 하나다.
일본이 러·일전쟁후 이곳에 즉각 관동도독부를 설치하여, 총독의 지휘감독아래
전옥을 두고 형무소를 관장하게 했다.
안의사가 여기서 수감중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동안여러자료에
나타난 정황을 종합해볼때 일본은 안의사에 대한 정중한 예우로 고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안의사 자서전에서 검찰관은 항시 나를 신문한 후 담배를 권하며, 공정한
토론을 했고, 형무소장 구리하라와 일본관리들도 모두 친절을 베풀어주어 고마웠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안의사는 1909년 11월 4일 여순에서 2번째 검찰관 신문을 시작으로 이듬해
12월 26일까지 모두 11번째 신문을 받았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검찰관의 신문태도는
강압적인 분위기로 변해갔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안의사 의거의 정당성, 재판행사의 애매성,
안의사의 돈독한 신앙심등에 대한 높은 평가로 안의사 형량에 대해 무기징역을 고려했으나,
일본 정부내 강경파가 서둘러 극형에 처하라는 밀명을 보내옴에 따라 관동도독부
법원의 태도가 표변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여순지방 법원의 공판 1910년 1월 중순 여순지방법원은 안의사에 대한 첫 공판날짜를
2월 7일로 결정했다. 법원의 재판제도는 지방법원에서는 판사가 단독으로 심리 재판하는
2심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1심 이전에 예심을 거치도록 돼 있었으나
안의사의 경우만은 중대한 사건 임에도 불구하고 본국정부의 지령에 의해 예심을
거치지 않고 곧 바로 1심 공판에 부치기로 한것이다.
2월 1일 검찰관은 안중근은 살인, 우덕순과 조도선은 살인예비, 류동하는 살인방조의
죄명으로 예심을 생략한채 지방법원에 공판을 청구했고, 지방법원은 속전속결로 이날
재판부를 구성, 제1차 공판을 개정키로 최종 확인했다.
재판부는 주임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 법원장 마나베 담당검찰관은 미즈노와
가마다로 전원 일본인으로 결정되었다.
1910년 2월 7일 마침내 공판 첫날이 다가왔다. 안의사를 비롯 4명의 피고는 체포되던
당시의 복장 그대로 일본에서 들여온 마차를 타고 아침 일찍 여순 감옥을 나섰다.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마차를 삼엄하게 호위했다.
관동도독부 법원청사에 도착 아래층 좁은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의사일행은
오전 9시쯤 2층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1호법정에 입장, 포박에서 풀려나 방청석
맨앞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이날 공판정에는 우선 블라디보스톡의 동지들이 돈을 모아 보낸 러시아인 변호사
미하일로프 해외 동포들의 성금으로 보내진 영국의 변호사 더글러스 그리고 서울의
유지들과 안의사의 어머니가 보낸 안병찬 변호사등이 참석했으나, 이들을 공판에
참여할 수 없게끔 한데서부터 공판은 공정하지 못했다.
방청객이 아침 6시부터 모여들었으나, 재판소측은 300명으로 제한했고, 방청석에는
러시아인 3명, 한국인 3명 안병찬 변사와 안의사의 두 동생, 더글러스변호사만이
외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많은 신문기자가 이 세기(世紀)적 재판을
지켜보러 와 있었다.
오전 9시 20분께 마나베 판사는 피고 4명의 인정심문에 이어 안의사부터 개별신문에
들어갔다.
가정과 교육 신앙등에 이은 “3년간의 연해주 망명생활에서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었는가”에 대한 신문대목에서, 안의사는 “목적의 첫째는 한국을 계몽시키는 교육
운동에 관한 것, 또다른 하나는 내가 본국의 의병으로서 국사를 위한 것으로 본격적인
순회 계몽연설이었다”고 대답했다.
이어 이또 총살목적에 이르러서는 공판정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안의사는
조용히 그리고 당당하게 의거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러 일전쟁에 대한 일본천황의 칙서에 의하면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 이겼을 때 한국인은 마치 우리나라가 승리한 것 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안가서 이또가 한국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맺었다. 그것은
일본 천황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한국인은 모두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어 7개 조약을 맺어 한국인의 불이익은 더해 갔다. 또한 한국 황제의 폐위까지
강행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은 이또를 죽였다.
이또를 원수로 삼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의거의 이유 내가 이또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자격으로 이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 의군참모총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했다.
형식적인 재판은 일본정부의 강압으로 서둘러 신문, 변호, 구형등 한주일에 모두
끝냈다. 안의사 사건에 관심을 가진 식자는 공판자체가 원인무효 라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 이유는 우선 사건이 제정 러시아의 조차지역(祖借地域)에서 일어났고, 안의사가
한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일본형법에 의해 재판권을 행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열강이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약소국 국민을 부당하게 재판한 하나의
선례다.
다음은 외국인 민선변호인단을 인정하지않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관선변호인을
지명하여 재판을 진행했디는 점이다. 이는 법률위반일 뿐 아니라 상식을 벗어난 조치로
지적받는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피고의 인권을 봉쇄한 상태에서 재판을 속전속결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안의사는 “사형”이라는 언도를
받자.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이 판결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의사의 태도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될지도 모를 상고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2월 19일 안의사가 공소권을 포기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놀랐다. 고등법원장 히라이시는
일부러 형무소로 안의사를 찾아와 상고를 권고하였으나 안의사는 끝내 이를 거절했다.
이는 장부다운 기품이며, 의병다운 의병의 태도였다. 안의사가 상고하지 않은 것은
그의 굳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심의 뒷받침에는 어머니의 성원이 있었음을 잊을 수 없다. 안의사의 모친은
안의사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두 동생을 급히 여순으로 보내면서
어미의 뜻을 전하라고 했다.
“올바른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한국에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에 시모시라(그 어머니에 그 아들) 라는 글을 실었다.
상고를 포기하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안의사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자기
신앙에 따라 천주교 신부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의
의무로서, 죽음에 이르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청산하는 고해성사, 영성체 그리고
종부성사를 함으로써 신앙인다운 인생을 끝마치기 위해서였다.
안의사는 이 모든 것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 함으로써 내세를 기다렸다.
안의사의 국권회복을 위한 전략이 독립전쟁 전략이라면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동양평화론이다.
안의사는 옥중에서 3개월여에 걸쳐 출생에서부터 의병활동과 하얼빈 거사 그리고
여순에서 사형언도를 받기까지의 옥중생활을 집필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완결 짓고
3월 15일 부터는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결심하고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에게 책이 완성될때까지
사형을 연기해 줄것을 허락 받았으나, 결국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함으로서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쓸수있는 여유는 불과 10일뿐이므로, 서문과 전람 일부분만 쓸 수 밖에
없었다.
동양평화론은 안의사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운 의사의 지론으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였다.
안중근 의사는 조선왕조 말에 태어나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던 대한제국 시대에
순국한 민족정기의 애국지사다.
따라서, 안의사의 짧은 생애는 동양평화를 위한 항일 독립운동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안의사의 성장배경과 의병활동 그리고 의거의 결행과 순국의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준 그의 철학과 사상에서 잘 나타난다. 1910년 3월 26일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기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에서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 해 힘쓸 것이다. 그리고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서고 있는 이른바 인생 마지막 순간의 지략에서도 이승과 저승을
잇는 뜻을 남겨놓음으로서 뒷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의 발전을 위하여
사람마다 제구실을 다 하게끔 당당한 의기를 심어주었다.
안의사의 그같은 순국은 당시 중국의 장개석총통이 휘호로서 남긴 “장열천주”
내용과 같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의 의거는 너무도 당연한 민족정기의
표상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민족정기는 자칫 잘못하면 배타적 민족주의 관념에 사로잡혀 주관적 성향에 지나치리
만큼 기울기 쉽다. 그러나 안의사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준 민족정기는 우리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일본인에게 있어서 조차도 공명을 얻고 있었으니 안의사의 주장은
참으로 정당하였다.
그리고 의사가 옥중에서 순국 직전까지 집필한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통해 일본의
대륙침략을 규탄하고, 이러한 침략정책은 결국 일본의 패망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러한 의사의 대세판단 이야말로 마침내는 청.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관계와 동북아 상황 그대로 적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의사는 이렇듯 진정한 동양평화의 수호자였으나, 그뜻을 펴지 못하고
이역만리 중국땅 여순감옥에서 32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그러나, 의사의 몸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의 유작인 동양평화론을 통해
“함성산패 만고정리”라고 하는 불멸의 철학과 사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널리 남겼다.
의사는 이글에서 항상 이해관계가 상충하기쉬운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양 3국이
중심이 되어, 여순과 같은 분쟁지역에 유럽 공동체와 같은 상설기구를 만들어 상호
협력함으로써, 동북아의 발전은 물론, 세계평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지금도
안의사의 사상연구와 숭모활동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활발이 진행되고
있고, 서울의 남산공원에 안의사 기념관을 건립 안의사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망국의 한으로 온나라가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었을때 안의사의 의거는 나라안팎
사람들에게 크나큰 경각심을 주었고, 항일의식의 국민적 확산은 물론이려니와 뜻있는
분들의 독립운동을 가열케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나라를 잃고서도 어쩔줄 모르던
국민들 가슴속에 자주독립을 외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민족정기를 소생시켰다는데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지금으로 부터 88년전 민족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응징했던 역사의 장면을 노래한
“대한국인 안중근” 이란 민족혼을 일깨우는 노래가 1997년 새해에 발표되었다.
안중근 의사 숭모회 회원이기도한 안용희씨가 작사.작곡한 이 노래말을 끝으로
대미를 끝낸다.
대한국인 안중근 (작사·작곡·편곡) 안용희. 노래: 변근수 “밀려오는 거센 파도
작은 돛단배 떠 있구나. 에일 듯이 설한풍아 가리운 옷깃이 애처롭네. 너와 나는
숙명의 길 모진 바람 불어. 눈보라가 쳐도 언약한 그 길 맹세코 가련다. 외로운 길
쓸쓸한 길 억천만리 너를 찾아. 나는 가리 한발 두발 가고야 말리라 혼자 되어도.
꺼져가는 등불 에워싸 이 한몸으로 가리우고. 사나이 길 가시밭길 억울한 길 순정의
길. 송죽절개 남아일도 굽힘없이 나는 가리. 대한국인 안중근. 만민 평화 너를 위해
비호같이 초개같이. 이 한 목숨 다 바쳤노라. 만민자유 만민통일 만민행복 만민사랑.
나의 조국아 영원하라.”